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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9일 일요일

직접 입법(Direct Legislation)과 새로운 의회-시민 관계: 2018 헌법개혁 논의에 부쳐

[월간 <시대> 제58호/ 2018년 5월호, pp. 8-20.]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Tampere 대학교 정치학 박사, 서울대 강사
 
1. 근대의 정치적 조건과 직접 민주주의 논쟁

다수의 독재또는 무분별한 포퓰리즘에 대한 오래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접 민주주의 구상은 루소(Rousseau)로부터 페이트만(Pateman)과 바버(Barber)까지 많은 참여 민주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어왔다. 이들은 회합 민주주의(assembly democracy)에 대한 고전적 이상을 회복함으로써 선거적 형태의 대의 정부가 가지는 민주적 결함을 극복하기를 희망했다. 직접 민주주의가 정치 과정의 중심에서 작동하는 스위스의 사례는 직접 민주주의가 근대 사회의 정치적 조건 속에서도 실행될 수 있음을 입증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회합 민주주의와 달리 본질적으로 대의 정부 시스템의 기반 위에 수립된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매디슨 등은 (직접) 민주주의의 불안정함과 인민들의 불완전성 때문에 대의 민주주의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참정권조차도 20세기 초반 들어서야 도입, 확대되었다.

스위스는 1848년 혁명 이후 국민투표(referendum) 기반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국민투표와 (완전형) 시민발의제도가 1874년과 1891년의 헌법 개혁들을 통해 각각 도입됐다. 이후 미국의 많은 주들이 스위스 모델을 따르면서 주민투표와 시민발의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 그리고 나치 등 전체주의 체제들에서 일어난 대중 참여의 남용으로 인해 직접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유럽 국가들이 민주주의 질서를 회복하면서도 의회와 정당 중심의 대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선호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재생된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전후 구축된 안정된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복지국가 질서의 기반에 균열이 오면서 대안적 의제 설정과 직접 행동주의를 추구하는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이 출현했다. ‘비판적 시민들’(critical citizens)은 더 투명한 정부와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적 시민 참여를 요구했다. 참여민주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의회와 정당 등 대의 기구를 우회하는 직접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이 더 자주 활용됐다. 알트만(Altman 2011)에 따르면, 1984년부터 200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국가 단위 수준에서 직접 민주주의 메커니즘이 총 949(시민 주도 메커니즘 328, 위로부터의 메커니즘 621) 실행됐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의 제도적 적합성, 국민투표와 시민발의의 정책적 효과와 정치적 영향,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 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됐다. 논쟁은 주로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 간의 고전적 이분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벗지(Budge 2013)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주요 비판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근대 사회에서 함께 토론하고 표결하도록 모든 시민들을 소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유권자들은 이미 총선을 통해 정당한 정부와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3) 평범한 시민들은 숙고된 판단을 내릴 역량이 없으며 정책 전문성을 결여하고 있다. (4) 다수의 전제(專制)와 소수자 인권의 침해라는 위협은 현실이다. (5) 정당과 입법부 등 중간 매개적제도들을 침식하는 것은 일관성 없고, 불안정하며, 무분별한 정책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에 대해 직접 민주주의의 옹호자들은 총선이 개별 정책에 관한 유권자 선호를 올바로 집약하는 것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다수의 전제에 대한 전통적 두려움이나 인민의 역량에 대한 회의는 단지 직접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와 연관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오늘날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교육받고 정보를 습득하고 있으며, 더 좋은 시민들은 참여적 경험을 통해 교육될 수 있다. 특히, 직접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의 양립 가능성’(compatibility)을 강조한다. 이들은 신중하게 설계된 절차적 규정들과 더불어 매개된’(mediated)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는 스위스, 이탈리아, 퀘벡 등에서 보듯이 대의 기구들을 희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특정한 정책에 관한 선거대의제적 선거에도 이로움을 가져올 수 있다. 급속한 기술 발전은 온라인 포럼, e-서명이나 e-투표 시스템 등을 통해 시민들이 쉽게 논쟁과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Budge 2013; Altman 2011)

직접 민주주의의 옹호자들이 내세우는 반(counter) 비판들은 오늘날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들로 들리지만 경험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더 검토해야할 중요한 이슈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핵심 이슈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법적 프레임워크, 진입 장벽, 절차적 요건 등을 포함해 어떤 형태의 제도적 디자인이 대의 기구들의 본질적 기능을 침식하지 않으면서 직접 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가? (2) 중간 매개적 대의 기구들이 시민 주도적직접 민주주의 메커니즘의 절차적 진행 과정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끼치거나 개입하는가? (3) 직접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다양한 형태의 부정의를 해결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가, 아니면 포퓰리즘적이고 보수적 의제들을 좇으며 소수자 권리의 제약으로 이어지는데 기여하는가? 스위스의 경험은 거시 경제적 수준, 사회통합, 시민 참여의 측면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긍정적 결과를 시사하지만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2. 직접 민주주의 메커니즘으로서 시민발의제도

시민발의(popular or citizens’ initiatives)는 국민투표(referendum)와 더불어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대표적 기제이다. 선거가 대표자(representatives)를 선출해 일정 기간 동안 정치적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민주적 정당성 기제인 반면, 위의 직접 민주주의 기제들은 선거 사이(between elections)의 시기에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들이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민 발의는 일정 기간 동안 특정 수 이상의 시민 서명이 있는 경우 그 법안이나 정책 제안을 의회 등 대의 기구에 제출, 심의 받을 수 있게 허용하는 제도로서 일부 국가에서는 국민투표와 연계되어 실행되기도 한다. 시민발의의 기원은 스위스가 1891년에 제도를 도입한 데서 비롯됐다. 20세기의 정치적 격변과 헌법 개혁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발의 제도는 오스트리아(1920년 도입/ 1963년 재도입), 이탈리아(1947/ 1970), 스페인(1984), 독일연방의 일부 주(1990) 등 다른 유럽 국가들로 점차 확대됐다. 동유럽과 발틱 국가들은 1990년대 민주적 체제 전환 이후 새로운 헌법 제정 과정에서 시민발의를 포함한 직접 민주주의 제도들을 도입한 경우이다. 가장 최근에는 20114월 유럽연합이 유럽 시민발의(European Citizens’ Initiative) 제도를 채택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핀란드가 같은 해 시민발의제도를 헌법 개정과 연계된 별도 입법을 통해 도입했다.

시민 발의가 도입되는 과정의 각국이 처했던 역사적-정치적 맥락의 차이들은 개별 제도의 디자인과 실제 실행 과정, 그리고 정치적 효과 등에 투영돼 나타나며, 이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시민발의 제도에는 매우 큰 다양성이 관찰된다. 우선, 기본적 제도의 유형을 비교해보면,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라트비아는 국민투표와 연계되어 운영되는 완전형 시민발의(full-scale initiatives)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반면, 오스트리아, 폴란드, 스페인, 그리고 EU와 핀란드는 국민투표와 연계되지 않는 의제형 시민발의(agenda initiatives)를 운영한다. 이탈리아, 헝가리,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그리고 독일의 일부 주들의 경우에는 앞의 두 유형을 모두 사용하는 혼합형 시민발의(mixed-form initiatives) 제도로 분류된다.

필요한 서명의 수와 서명 수집 기간 등 시민발의를 조직하기 위한 절차적 요건들도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스위스의 완전형 시민발의는 18개월 내 10만 명(유권자의 2%)의 서명을 요구하는 반면, 리투아니아 시스템은 3개월 내 30만 명(유권자의 11.4%)의 서명을 요구한다. 슬로바키아의 의제형 시민발의가 시간 제약 없이 10만 명(유권자의 2.3%)의 서명을 요구하는 반면, 이탈리아 시스템은 6개월 내 5만 명(0.1%)의 서명만을 요구한다. 제출된 시민발의에 대한 의회 심의 절차에도 상당한 정도의 편차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이탈리아 의회는 시민발의에 관한 절차적 규정을 구체적으로 규제하지 않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의회는 시민발의에 대한 심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반면, 폴란드 의회는 시민발의에 관한 의회 절차를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시민발의의 정치적 역할 또한 해당 국가의 정치적 컨텍스트를 반영해 그 편차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직접 민주주의가 정치 시스템의 중심에 배태되어 있는 스위스에서 시민발의는 정책 의제와 정치시스템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규모 연정과 광범위한 정책 협의 시스템에 기반한 스위스 방식의 합의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가 시민발의 및 이와 연계된 국민투표의 도전을 피하기 위하여 발전되었다. 반면,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시민발의는 상당히 주변적’(marginal)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시민사회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데다 정치적 양극화와 권위주의 유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많은 나라들에서 정당들과 확립된 사회조직들이 자신들의 의제를 제기하고 유권자들을 동원하는 데 시민발의를 적극 활용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3. 핀란드의 시민발의 제도: 발의 요건, 실행 과정, 정치적 효과

핀란드 시민발의제도는 의제형 시민발의제로 18세 이상의 투표권을 가진 시민 5만 명 이상이 6개월 이내에 서명하는 법안이나 정책 제안에 대해 의회(Eduskunta)가 심의하도록 하고 있다(핀란드 헌법 Section 53). 핀란드 모델의 한 가지 특징은 온라인 서명 시스템(e-collecting system)을 허용한 것이다. 법무부가 운영하는 공식 온라인 플랫폼(kansalaisaloite.fi)에서 시민들은 모바일 인증이나 은행코드 인증 등을 거쳐 쉽게 발의안을 제안할 수 있고, 관련 서명을 모으거나 지지 서명할 수 있다. 201231일 제도가 시행된 이후 6년이 경과한 201841일까지 약 750 건의 시민발의가 제안되었고, 이 중 22건이 5만 명 넘는 서명을 받아 의회에 제출됐다. 이 중 16건에 대한 심의가 종료됐고, 그 중 2건의 시민발의가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아울러, 부결된 안건들 일부에 대해서도 의회가 정부에 제도 개선 조치를 권고하는 등 직간접적 정책 효과들이 나타났다.

핀란드의 시민발의제도는 정부 내각이나 기성 정당들이 제기하지 않으려하는 숨은정책 의제들을 발굴해 공론장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역사적인 첫 시민발의로 큰 관심을 모았던 핀란드 내 모피 산업의 금지법안은 환경과 동물권 분야의 대표적 네 단체가 공동 발의한 것이다. 동물의 복지와 권리 그리고 고용 유지 및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시민사회 내의 상충된 이해와 관점을 드러내면서 큰 논쟁을 불러왔다. 발의안은 부결됐지만 발의자들은 이슈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고, 의회에서도 전보다 두 배 더 많은 의원이 발의안에 공감한 점에서 시민발의제의 간접적 정책 효과를 긍정했다. 이 밖에도 저작권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시민발의는 거리 예술가들 등 현행 제도에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목소리를 의회와 공론장에 전달했다. 스웨덴어 교과목의 선택과목화를 주장하는 시민발의는 역사적으로 첨예한 정치적 균열을 제공했던 언어 정책에 관한 핀란드 엘리트들의 합의에 도전하면서 뜨거운 논쟁을 의회 안팎에서 불러일으켰다. (스웨덴어는 핀란드어와 함께 핀란드의 공용어이다.) 가장 최근인 2018년에는 현 우파연합정부가 강행하는 적극적 고용 모델’(Activation Model for Employment)에 항의해 한 실업자가 제기한 시민발의가 큰 반향을 불러모아 10만이 넘는 서명을 받았다. 이 발의가 촉발한 공공 여론의 환기에 힘입어 SAK 등 전국의 노동조합 조직들은 20182월 하루 총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가장 성공한 시민발의인 동성결혼 합법화안은 앞장에서 살펴본 헬싱키 중심의 새로운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적 시민행동 캠페인을 통해 실현되면서 의회와 시민 간의 새로운 관계와 소통 모델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의안은 법과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던 한 학생이 주위 친구들에게 제안한 데서 비롯되었고, 자발적 시민들이 모여 ‘Tahdon 2013’ (‘I Will’이라는 뜻)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온오프라인 캠페인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페이스북 등 SNS가 관련 정보를 전파하는데 큰 효과를 발휘했고, 효율적인 온라인 서명 시스템 덕분에 발의안이 공식 제안된 뒤 하루 만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서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오프라인에서도 플래시몹, 콘서트 등 페스티발 성격의 다양한 행사를 전개했다. 캠페인에는 100개가 넘는 기업들이 공개 지지를 표명하고, 당시 총리를 포함하여 유명 정치인들도 동참했다. 2014년 의회 본회의에서 최종 심의와 표결을 앞두고 의회 앞 광장에는 약 5,000명의 시민들이 모여 지지 집회를 열고 법 통과를 촉구했다. 이날 의회가 102-95의 근소한 차이로 법안을 통과시키자 전국 단위 정론지인 Helsingin Sanomat핀란드 의회가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했고, 핀란드 시민발의제도는 입법 의제 설정을 위한 정부 입법(Governmental Proposal)과 의원 입법(MP’s Motion) 외의 제3의 대안적 채널로서 제도적 공고화의 첫 문턱을 넘었다. 시민 발의제도는 또 의회 심의 과정, 특히 상임위원회 단계의 입법 심의 과정을 더 개방적이 되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정당 중심 입법 정치와 위원회 내부의 합의 문화 등을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정치적 다이내믹을 창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는 1970년대부터 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 시민발의제도(local citizens’ initaitives)와 주민투표(local referendums) 제도를 허용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 15세 이상의 주민은 누구나 지역 시민 발의(를 제기할 수 있고, 인구의 2%가 넘는 주민들이 지지 서명한 정책 제안이나 요구에 대해서는 6개월 이내에 지방자치단체가 공식적인 심의 결과를 회신해야 한다. , 인구의 5% 이상의 주민들이 서명하는 경우에는 관련 제안을 주민투표에 회부하도록 하고 있다. 주민투표의 결과는 자문적(advisory)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수용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다수 주민들이 투표한 안은 민주적 압력으로 작용해 대개 지방자치단체의 최종 결정에 반영된다. 핀란드는 지역 시민발의제도에도 정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플랫폼 서비스(kuntalaisaloite.fi)를 제공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 서비스가 개시된 201391일부터 2017831일까지 4년 동안 총 2,220건의 지역 시민발의가 제안되었고, 그 중 52건은 지역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내용의 발의안이었다.
 
4. 결론 및 제언: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양립 모델을 향하여

2018326일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 개정안을 공식 발의해 의회에 제출했다. 개정안은 전문, 기본권, 권력구조, 지방분권, 경제질서, 사법제도 등 헌법이 포괄하는 제반 분야와 조항에 걸쳐 크고 작은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 국민발안제와 국민소환제 등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하는 내용은 촛불 이후의 새로운 정치적 조건 속에서 공식적 대의 민주주의 제도와 광장에서 표출된 직접적 시민 정치를 결합하기 위한 핵심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는 흔히 이분법적 대립물로 이해돼 왔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의 발달은 고전적 이분법을 넘어 양자 간의 균형적이고 양립 가능한 모델이 가능하고 또 필요함을 시사한다. 동시에, 시민발의제 등 직접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의 이용을 국민의 헌법적 권리로서 보장한다고 합의하는 경우에도 향후 어떻게 제도를 구체적으로 디자인하고 실행할 것인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겨져 있다. 비록 국회 내 합의의 지연으로 6월 지방선거에서 개헌 국민투표가 동시 실시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나, 향후 헌법개혁과 관련 법률의 제정 과정에서 계속 면밀히 숙고돼야 할 사항들을 제언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1) 시민발의를 비롯한 직접 민주주의 메커니즘의 도입 과제는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인 헌법 개혁, 선거제도 개혁 등 정치제도 전반의 개혁 과제와 연계된 거시적, 전일적(holistic) 관점과 오늘날 후기 근대적 민주주의 조건에 부응하는 열린, 포용적 의회-시민 관계를 추구하는 종합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비례대표제와 의회 중심주의 등 정치적 대표의 기제가 온전히 발전되지 않고 정당과 의회에 대한 신뢰가 매우 낮은 한국 정치의 조건에서 실효성있는 정치개혁 전략과 우선순위 설정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2) 시민발의제도를 한국에서도 도입하기로 하는 경우 우선 의제형인가, 완전형인가의 문제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해외 선진국들의 제도적 디자인과 특징, 실제 운용 경험 등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토론이 요청된다. 포퓰리즘의 확대와 정치적 양극화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급변하는 민주주의의 조건과 촛불 이후 고양된 시민사회의 요구 등을 감안할 때 제도상으로는 적어도 의회 심의 결과 발의안의 부결 시 국민투표로 연계될 가능성이 허용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이 경우 국민투표 회부 조건으로 상당히 엄격한 절차적 요건을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핀란드 사례에서 보이듯이 의제의 공론화 및 실질적 제도 개선 등 간접적 정책 효과와 정치 시스템 전반의 영향 등을 감안할 때 의제형 시민발의제도도 충분히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판단된다.
(3) 서명인 수, 서명 모집 기간, 적법 연령 등 절차적 요건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외 사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판단하되, 절대적 또는 확립된 명확한 기준이 있지는 않다는 점을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핀란드의 경우(인구의 0.9%, 유권자의 1.2%)처럼 서명인의 수가 인구의 1% 내외 선에서 결정하면 적절하리라 판단되며, 초기 제도 시행 경과를 지켜보며 재검토할 여지를 갖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서명 모집 기간은 6개월-1년 이내 정도면 적정하리라 판단되며, 연령은 만 18세 이상으로 설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지방 주민발의제도(local citizens’ initiatives)의 경우에는 만 16세 이상의 기준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4) 온라인 서명 시스템(e-collection system)은 디지털 민주주의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도입하되 서명 진위 확인 및 개인정보 보안 문제를 엄격히 고려해 시스템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국정원 댓글 사건 등 국가기관이 개입해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하고 온라인 민주주의 발전을 왜곡, 저해한 사례 등을 고려할 때 기술적 보안의 문제는 각별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엄격히 설계된 정부 운영 플랫폼만 허용하고, 이에 대한 의회 감사와 시민사회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일정 기간을 정해 제도 설계와 실험을 전개한 뒤 전면 시행하는 등의 사려깊은 제도 실행 프로세스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제도 운영이 원활히 이루어지고 사회적 신뢰가 제고된 뒤 핀란드처럼 정부 차원의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demokratia.fi)을 설계,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5) 의회 심의 절차와 관련하여 시민발의자 또는 그 대표자가 의회 본회의장과 위원회 등에 직접 출석해 발의안의 취지와 목표를 설명하고 의원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입법 심의 과정에서 관련 전문가 및 다양한 시민사회 이해관계자들과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입법 협의 절차를 가동하고, 필요하다면 일반 시민들도 손쉽게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공공 포럼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소관 상임위원회 심의 후에는 반드시 별도 보고서를 채택해 본회의에 보고하고, 이를 토대로 시민발의안에 대한 본회의 토론을 진행한 뒤 표결로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시민들이 제출한 의제가 의회 전 과정에서 충실하고 밀도있게 심의되는 것을 보장해야 한다.

(6) 시민발의제 등의 직접 또는 참여 민주주의적 제도를 국가적 수준에서 도입하는 경우 의회 내에 별도의 시민참여·소통위원회 등을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새로이 설립되는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1) 의회 차원의 중장기적 시민 소통과 참여 전략 수립; (2) 시민 친화적 관점에서 시민발의안들에 관한 의회 심의 절차와 규정 관장; (3) 소관 상임위원회와 시민발의자 사이의 원활한 대화와 협의를 매개, 촉진; (4) 서명 정족수에 미달해 의회에 제출되지 못한 발의안들을 정기적으로 리뷰하여 새로운 입법 의제 발굴 및 유권자들의 요구를 해소하는 방안을 마련; (5) 시민의회, 시민합의회의, 시민정보센터, 청소년의회 등 다양한 시민교육 및 혁신적 시민참여 프로그램 주관, 운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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