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법인 <함께걷는아이들> 블로그 기고문 (2018.2.)]
핀란드의 민주주의와 아동, 청소년의 정치 참여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 (Tampere)대학교 연구원(정치학 박사)
들어가며: 한국에서 30대 대통령이 불가능한 까닭
작년 프랑스 대선 1차 투표가 끝나고 2차 투표를 앞두고 있던 2017년 5월, France 24라는 뉴스 채널을 보다가 유력 후보인 마크롱의 나이가 39세이며, 프랑스에서는 18세 이상 시민 누구나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다는 설명이 문득 내 신경을 건드렸다. “어, 한국에선 대통령 출마를 위한 연령 제한이 40세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여전히 한국의 대통령 피선거권은 40세로 제한돼 있었다. 이처럼 보수적 기준이 어떻게 헌법에 명문화됐을까 의아해 관련 정보를 더 찾아보았다. 헌법에 명문화된 이 규정은 1962년 12월 박정희가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기수로 떠오르던 김영삼, 이철승, 김대중 등 젊은 정치인들의 출마를 막기 위해 도입했다고 했다. 자신도 44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으면서 그 권력에 도전할 만한 다른 청년 정치인들의 출마를 미리 봉쇄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삼십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조항을 그대로 헌법에 유지한 채 일곱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도, 지방자치단체장도, 심지어 광역과 기초지방자치단체 의원도 피선거권은 모두 25세 이상에게만 주어진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혼할 수 있고, 군대에 가 공동체 방어의 의무를 수행하며, 직업을 구해 일하며 세금을 내는 등 온전한 시민적 권리와 책임을 지닌 동료 시민들이 25세에 이르지 못하면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권리가 제한되는 것이다. 반면, 핀란드 등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18세가 되면 의회나 지방자치선거에 출마할 권리를 부여한다. 더욱이 한국은 각급 선거 투표권을 만 19세 이상에게만 허용하고 있는데, 이는 OECD 국가들 중 유일한 것으로 대부분의 나라는 만 18세를 기준으로 하고 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2007년부터 만 16세 이상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다.
헌법적 가치로서 아동, 청소년의 인권과 참여
아동,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핀란드의 사례를 예로 들어 민주주의 선진국과 한국의 차이를 살펴보고 그 해법을 찾아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정치공동체와 사회 운영의 최고 원리를 규정한 헌법에서부터 한 가지 근원적 차이가 감지된다. 핀란드 헌법 제6조(Section 6)는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다루는 헌법 제2장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부분인데, 만인의 법 앞의 평등과 차별금지 조항에 이어 곧바로 아동의 인권 보장에 관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 “어린이들은 평등하게 그리고 개인들로 대우받아야 하며 그들의 발달 수준에 상응하는 정도로 자신들에 관한 문제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돼야 한다.” (Children shall be treated equally and as individuals and they shall be allowed to influence matters pertaining to themselves to a degree corresponding to their level of development.) 아동, 청소년의 인권 보장과 민주적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의 권리가 어느 정도의 위상과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배우기 시작하는 과목 중에 오이께우스(Oikeus)가 있는데, 이 말은 ‘정의’, ‘법률’, ‘권리’라는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 지난 가을 아이가 가져온 교과서를 펴보니 첫 장부터 헌법과 국제인권규약이 보장하는 다양한 목록의 아동 인권이 서술돼있고, 민주주의에서는 “내 삶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정책이나 의사결정에 누구든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었다.
지방자치단체 산하의 어린이 의회와 청소년위원회 제도
실제로 핀란드는 아동, 청소년 관련 정책 결정 과정에 당사자들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나의 아이는 현재 만 11세로 핀란드 공립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인데, 지난 학기 반에서 투표를 통해 부대표로 선출됐다. 어느 날 내게 반 대표 선거에 나가도 되느냐고 물어 나는 공동체 업무에 참여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므로 당연히 된다고 했더니 적극적으로 의사를 밝혔던 모양이다.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학교 전체 학생회 대표 선거에 나가도 되느냐고 해서 또 그러라고 했다. 아쉽게도 3위에 머물러 대표와 부대표로 구성되는 회장단이 되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 대표가 되고 싶어했던 한 가지 이유를 들어보니 회장단이 되면 시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의회(Lasten Parlamentti)에 대표로 참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린이 의회는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Tampere 시를 비롯해 주요 지방자치단체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운영하고 있는 제도이다. 또, 7학년부터 9학년까지 고학년이 되면 시에서 운영하는 청소년위원회(Nuorten valtuusto)에 참석할 학교 대표를 선발한다고 했다. 실제로 이들은 정례적으로 모여 시에서 시행하는 아동, 청소년 관련 정책에 대해 심의하고 의견을 제시하며, 청소년 대표가 직접 맡는 청소년위원회 위원장은 시 공무원들이 가져오는 결재 문서에 서명까지 한다고 한다. 비단 아동, 청소년만이 아니라 핀란드의 주요 지방자치단체들은 장애인위원회와 노인위원회를 구성해 당사자들에 관련된 정책 결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국회의장이 주재하고 총리가 출석, 답변하는 청소년 의회 프로그램
이러한 아동, 청소년의 민주주의 참여 경험은 그 자체로 훌륭한 정치 교육이자 시민 교육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박사논문 작성 과정에서 내가 연구한 핀란드 의회도 2004년부터 청소년 의회(Nuorten Parlamentti)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하 청소년 의회 관련 설명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을 발췌, 인용한 것임) 청소년 의회는 1994년 프랑스에서 처음 도입됐고, 이후 많은 유럽 국가들로 확대되었는데, 핀란드는 1998년 처음 실시했다. 청소년 의회의 목적은 (1) 청소년들이 다양한 행위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인식하도록 돕고, (2) 청소년들이 의회와 핀란드 민주주의에 대해 더 잘 알게 하며, (3) 핀란드 정치 제도에서 참여에 필요한 역량을 계발하는 것, (4) 청소년들이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것, 그리고 (5) 입법자들에게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 등이다. 핀란드 청소년 의회는 의장을 뺀 국회의원의 수와 똑같이 199명의 청소년 의원들로 구성되며, 전국에서 선발된 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한다. 지역 학교들에서 운영되는 의회 클럽들(parliamentary clubs)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택한 뒤 2년에 한 번씩 전체 회의를 소집하는 청소년의회에 파견하는 방식이다. (실제 선거구 크기와 동일하게 지역별로 좌석 할당)
2014년 3월 28일 개최된 청소년 의회의 모습은 전체 회의가 소집된 날 하루 동안 핀란드 청소년 의회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청소년 의원들은 오전 세션에 7개의 상임위원회로 배치되어 의회인 에두스꾼따(Eduskunta)에서 이루어지는 입법 활동을 탐색했다. 대위원회에 배속된 학생 의원들은 당시 헬싱키를 방문한 마틴 슐츠(Martin Schulz)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 의장과 함께 유럽 문제들을 토론할 수 있었다. 오후에 학생들은 본회의 세션에 합류해 의회 의장이 직접 사회를 본 ‘총리에 대한 질문 시간’(Question Time)에 참여했다. 14명의 장관들이 청소년 의원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의회 본회의에 직접 참석해 있었다.(http://verkkolahetys.eduskunta.fi/webtv.case#c=2394863&v=39239550&p=0&l=fi&t=0(2014.9.9. 검색) 이 프로그램은 공영방송인 YLE 1과 의회 웹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됐다. 2016년 3월 15일 개최된 가장 최근의 청소년 의회에도 총리와 다른 여러 장관들이 참석했는데, 학생 의원들은 유럽 난민 위기, 핀란드의 NATO 회원 가입 여무, 정부의 긴축 정책 등 여러 비판적 질문들을 던졌다. (E.Pyykkönen,”Koululaisethiillostivatministereitä”, HelsinginSanomat, 2016년 3월 16일. 청소년 의회 웹사이트(www.nuortenparlamentti.fi)도 함께 참조.)
15세부터 참여할 수 있는 주민발의(local citizens’ initiatives) 제도
또, 핀란드는 지방과 국가 수준에서 시민발의(citizens’ initiatives)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가 수준의 시민발의는 18세 이상의 유권자들이 참여할 수 있지만 지방 수준의 주민발의 제도에는 15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 경우 인구의 2%가 넘는 주민들이 지지 서명한 정책 제안이나 요구에 대해서는 6개월 이내에 지방자치단체가 공식적인 심의 결과를 회신해야 한다. 또, 인구의 5% 이상의 주민들이 서명하는 경우에는 관련 제안을 주민투표에 회부하도록 하고 있다. 주민투표의 결과는 자문적(advisory)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가 수용할 의무는 없지만, 다수 주민들이 투표한 안은 민주적 압력으로 작용해 대개 지방자치단체의 최종 결정에 반영된다. 핀란드는 시민발의제도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플랫폼 서비스(전국 시민발의: kansalaisaloite.fi; 지역 주민발의: kuntalaisaloite.fi)를 제공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 서비스가 개시된 2013년 9월 1일부터 2017년 8월 31일까지 4년 동안 총 2,220건의 지역 시민발의가 제안되었고, 그 중 52건은 지역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내용의 발의안이었다. (서현수, 『주민 주도 공동체 발전 방안 연구: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의 사회혁신 정책 및 사례를 중심으로』, 사회복지법인 함께걷는아이들 연구용역 프로젝트 보고서, 2017, p. 115에서 발췌, 인용.) 한편, 시민단체들은 국가 수준의 시민발의의 경우에도 16세 이상 청소년들도 발의와 서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연령 기준을 낮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당 청년 조직과 청년 대표들의 역할
그러나 청(소)년들의 가장 실질적인 정치참여가 일어나는 통로는 정당들의 청년 조직(youth organizations)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핀란드에는 9개의 의회 정당 그룹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청년 조직들을 운영하고 있다. 청년 정당 조직들은 향후 그 정당의 지도자로 성장해갈 청(소)년들이 일찍부터 정치 참여 경험과 정치 교육을 쌓는 현장이 되고 있다. 청년 조직의 대표들은 이미 당에서 중요한 인물들로 대우받으며 당의 부대표 등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핀란드 사민당(SDP)의 제1부대표인 산나 마린(Sanna Marin)은 현재 32세이며, 땀뻬레(Tampere) 시의회 의장을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된 2015년에는 28세의 나이였다. 사민당의 원내대표인 안띠 린뜨마넨(Antti Lintmanen)은 현재 35세로 핀란드 최대 중앙 노조인 SAK에서 활동한 뒤 28세이던 2011년부터 국회의원을 역임해왔다. 급진좌파 정당인 좌파동맹(Left Alliance)의 대표 리 안데르손(Li Andersson)도 1987년생의 젊은 여성으로 TV 토론과 캠페인 역량이 상당하다. 지난 해 내가 한 프로젝트 연구를 위해 인터뷰한 마리아 오히살로(Maria Ohisalo)도 현재 32세의 젊은 여성으로 녹색당의 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빈곤 문제 연구로 Eastern Finland 대학교에서 최근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녀는 핀란드 홈리스와 저소득층을 위한 혁신적 비영리 주거복지 재단(Y-Foundation)에서 일하며 동시에 헬싱키 시의회 의원으로도 활약하고 있었다. 정당의 청년 조직들 또는 유기적 연계를 맺고 있는 노조나 NGO 등 시민사회에서 일찍부터 다양한 활동 경험을 쌓으면서 정치적, 정책적 역량을 늘려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소속 정당이 연정에 참여하게 되면 30대 총리나 장관들이 탄생하는 것이고, 이들은 민주주의와 정치과정에 새롭고 혁신적 관점을 불어넣는다. 물론 진정한 혁신적 개혁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지만, 이들 젊은 세대가 가져오는 새로움과 용기있는 실천이 없는 한 정치세계는 언제든 부패하고 진부해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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