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레이블이 복지국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복지국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8년 7월 29일 일요일

북유럽 성 평등 모델과 ‘미투’ 캠페인의 정치학

[프레시안 2018년 3월 19일 칼럼]

핀란드에서 박사 유학을 마치고 2018년 2월 28일 한국에 돌아온 뒤 한 달이 지났다. 한반도와 서울의 시계는 과연 숲과 호수의 나라 핀란드의 그것보다 빠르고 다이내믹했다. 남북 그리고 북미 간 정상회담 합의 소식에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 수감,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헌법 개혁안 발의까지 중대하고 굵직한 뉴스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졌다. 

뉴스들 가운데서도 압도적 사건은 미투 운동으로 제기된 성폭력 고발들이었다. 원로로 추앙받던 시인의 행태에 대한 폭로에 이어 연극계와 영화계 등에 만연한 성폭력 관행과 구조의 폭로는 내가 지금 어디로 다시 돌아온 것인지를 속으로 되묻게 했다. 특히,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관한 뉴스들은 정치적 이념과 진영, 세대를 막론하고 한국의 엘리트 정치인들 상당수가 내면화하고 있는 가부장제적 권위주의와 권력 지상주의에 대해 새삼 질문하도록 만들었다. 이번 미투 운동을 계기로 개별 사건 이면의 오래된 구조와 관행과 문화, 그 부패한 사회 정치적(!) 권력 관계를 전면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미투' 캠페인과 사회적 반응 
이런 상념은 나를 북유럽의 미투 운동과 담론의 현황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다. 북유럽 국가들은 보편적 복지국가와 더불어 높은 수준의 성 평등으로도 국제적 명성을 누려왔기 때문에 최근 전개되는 미투 캠페인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국제적 운동의 영향을 받아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에서도 최근 미투 캠페인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특히, 스웨덴에서 미투 캠페인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는데, 이 과정에서 TV, 라디오, 영화산업 등에 종사하는 일부 가해자들이 퇴출되는 일도 벌어졌다. 또, 6000명의 여성 변호사들이 단체로 서명해 법조계 내의 성적 학대와 차별 행태에 '무관용'(zero-tolerance) 정책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연극, 영화, 오페라 분야에 종사하는 천여 명의 여성 배우와 가수들도 집단 서명해 해당 산업에서 성희롱(sexual harrassment)를 영구 추방하고 관계 기구들의 정책 실패를 서둘러 바로잡으라고 촉구했다.  

핀란드에서도 최근 미투 캠페인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큰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유명한 영화감독 아꾸 로우히미에스(Aku Louhimies)가 영화 제작 과정에서 여배우들에게 모욕적이고 위험하며 심지어 가학적(sadistic) 방식의 연기를 강요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TV 등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2017년 핀란드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Tuntematon sotilas'('이름없는 병사들'이라는 뜻, 20세기 핀란드 문학의 거장 바이뇌 린나Väinö Linna가 핀란드의 대소 전쟁을 다룬 소설을 원제로 한 것임)의 감독을 맡았다. 영화는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모아 핀란드 영화사에서 최고로 기록됐다. 


▲스웨덴의 미투 캠페인 모습, 왼쪽 아래 사진은 스웨덴 평등부 장관 Åsa Regnér의 Me Too 집회 연설 모습 (출처: Me Too Sweden 페이스북 계정)


논쟁이 진행되면서 로우히미에스는 자신의 행위가 부적절했으며 자신이 감독으로서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의도와 촬영 진행 과정의 합의를 강조하던 그는 감독과 배우 간의 불균형한 권력관계 속에서 피해자들과 주변 스탭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며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국가와 성 평등 모델: 특징과 성취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높은 수준의 성 평등으로 유명한 북유럽 국가에서도 이러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서는 우선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과 높은 수준의 성 평등 시스템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결됐는지를 살펴보고, 그 바탕 위에서 최근 미투 캠페인을 둘러싼 논쟁의 맥락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 보편주의 혹은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체제로 분류되는 북유럽 모델은 (1) 비례대표제에 기반한 다당제 정당체계와 의회 중심 대의민주주의, (2) 민주적 코포라티즘(democratic corporatism)과 합의적 정책 결정 시스템, (3) 보편적 복지국가 서비스 체계 등을 핵심 제도적 기둥들로 삼아 진화해왔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또한 가장 여성 친화적(feminine) 사회 문화를 발전시켜왔는데, 일부 학자들은 아예 성 평등(gender equality)을 북유럽 모델의 네 번째 핵심 요소로 간주하기도 한다.  

북유럽 국가들이 높은 성 평등 수준을 달성할 수 있었던 핵심으로 두 요소를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높은 수준의 여성 정치 참여율이다. 북유럽은 비교적 일찍부터 여성 참정권을 보장했다. 19세기에 활약한 당시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초기 사회 개혁 운동에 적극적이었고, 여성 참정권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핀란드의 근대사를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노동계급의 형성과 시민사회의 성장, 그리고 여성 운동의 발전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점이 관찰된다.) 1906년 의회와 선거법 개혁을 통해 핀란드에서는 여성들을 포함한 만 24세 이상의 성인 모두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여성 참정권 보장은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빠른 것이었고, 여성의 피선거권까지 보장한 것은 세계 최초다. 오늘날 북유럽 의회들의 여성 의원 비율은 대체로 40% 내외의 수치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여성할당제를 적용하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에 속한다.  

둘째, 보편적 복지국가 서비스의 공급을 통한 높은 수준의 여성 노동시장 참여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여성의 사회경제적 권익과 지위 향상이 가능했다. 1930년대의 노사정 대타협과 사민당-농민/자유당의 연합 정치를 통해 북유럽 복지국가의 기초가 세워졌고,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1980년대까지 보편적 복지국가 서비스와 사회보험을 완비함으로써 오늘날의 북유럽 모델이 완성됐다. 시장 중심의 영미식 자유주의 복지국가 모델에서는 가구(households) 단위의 제도 설계와 자산 조사(means test)를 통한 자격 인증 방식으로 인해 결혼한 주부 여성들의 경우 사회보장 수급권 자격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남성 노동자의 임금 고용 중심 사회보험 체계를 발전시킨 독일 등 중부 유럽의 보수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에서는 돌봄 영역에서 가족과 교회의 역할이 강조됨으로써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제약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북유럽 등 보편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에서는 자산 조사 없이 전 인구계층을 포괄하는 보편적 사회보험이 발달했다. 나아가 건강, 교육, 주거, 아동과 노인 돌봄 등 제반 사회적 권리의 영역에서 보편적 공공 서비스의 공급이 이루어졌고, 이는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율 증진으로 이어졌다. 남성 부양자 모델(Male breadwinner model)을 벗어나 개인주의에 기반한 2인 소득자 모델(Dual breadwinner model)로 이행한 것이다.

그 결과 1990년대 이래의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 개혁 흐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은 EU나 OECD 등의 성 평등 지표(Gender Equality Index) 조사에서 여전히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를 나타내고 있다.  

68혁명 50년, 대안적 젠더 규범과 문화의 확립을 향하여
그러나 최근 전개되고 있는 미투 캠페인은 북유럽 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차별의 관행이 존재함을 드러내며 급진적 성찰과 대안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예술 문화 산업 전반과 학교 등 교육기관, 법조계, 그리고 의회 등 정치권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남성 상사들의 권력 남용이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직업 문화가 지배적인 영역이나 불안정 노동과 비정규적 형태의 고용 계약이 일반적인 분야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도드라진다. 곧, 한국이나 북유럽이나 미투 캠페인이 공통되게 제기하는 것은 젠더(gender)를 매개로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파생시키는 억압적 인간관계의 시정 요구인 셈이다. 

문화혁명으로 불리는 1968년의 참여 민주주의적 글로벌 사회 운동은 전후 구축된 안정된 복지국가 체계의 성공이 불러온 역설적 결과였다. 북유럽의 맥락에서 보자면, 그 뒤 50년 만에 전개되는 미투 운동의 흐름도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사회의 현실을 더욱 급진적 관점에서 성찰하고, 후기 근대적 민주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대안적 성적 규범과 문화의 확립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핀란드의 미투 캠페인 관련 의회 토론을 주도한 사민당의 Tuula Hatainen 의원. 2018년 1월 대통령 선거에서 사민당 후보로 출마해 성 평등과 소수자 인권 신장을 핵심 의제로 캠페인을 벌였다. (출처: Hatainen 의원 페이스북 계정)


핀란드의 미투 캠페인 과정에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의회와 정부, 공영방송 등 공신력 있는 대표 기구들과 노조 및 경영자협회 등 노동시장 대표 행위자들이 적극적으로 실태 파악과 공론화 과정에 나선다는 점이다.  

2017년 12월 12일 핀란드 의회는 사민당 의원 뚜울라 하따이넨(Tuula Hatainen)의 발의로 성희롱과 성적 학대를 주제로 한 본회의 토론 세션을 90분 간 진행했다. 의원들은 소속 정당을 초월해 학교와 직장 등 모든 영역에서 성적 괴롭힘에 대한 적극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핀란드 산업 분야의 이익을 대표하는 EK(핀란드 산업연맹)과 여러 분야의 노동조합들도 실태조사를 벌여 결과를 공개하면서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을 근절하고 평등한 직장 문화를 만들기 위한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대학교 정치학 박사는 서울대학교 강사입니다.)

<프레시안 칼럼> 원문 바로가기

사회적 대화를 위한 핀란드 모델: 핀란드는 어떻게 노사 대타협과 복지국가 합의를 이루었나?

노사 대결에서 합의로 대반전, 핀란드가 날아올랐다

[한겨레신문 2017년 11월 23일 기고문]


23년만의 총파업과 핀란드의 사회적 코포라티즘(Corporatism)

2015년 9월 18일, 핀란드의 3대 노조가 연합해 하루 총파업을 벌였다. 당시 유하 시삘라 총리가 이끄는 우파 연합정부(중앙당, 보수당, 민족주의 포퓰리즘 핀란드인당 3당 연정)가 장기 경기침체에 빠진 핀란드의 경쟁력을 강화하자며 공휴일 및 초과근무 수당 축소, 연금생활자 주거수당 축소 등을 강제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회에 제출한 데 대한 항의였다. 하루이긴 했지만 총파업은 1992년 이후 23년 만의 사건으로 철도, 버스, 항공 등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되고, 어린이집과 병원 등 공공서비스 기관 상당수가 운영을 멈추면서 국내외 여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파업에는 핀란드 3내 중앙노조인 에스아꼬(SAK), 에스떼떼꼬(STTK), 아까바(AKAVA) 산하 단체들이 대거 참가했다. 당일 낮 헬싱키역 광장의 집회에 3만 명이 넘는 노동자, 시민들이 참가한 것을 비롯해 핀란드 전역에서 약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항의 집회를 벌였다. 집회에 참여한 진보정당들(사민당, 녹색당, 좌파동맹 등)과 노조 대표들, 그리고 시민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복지 축소와 재정 긴축 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이들은 특히 시삘라 정부가 노사 간 자유로운 단체협상을 통해 노동시장 정책 및 관련 사회정책의 기본 내용을 정해온 핀란드의 사회적 합의 모델을 위배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로써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한 중앙당의 시삘라 총리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사회협약’ 체결은 수포가 되고, 핀란드의 사회적 코포라티즘 모델에도 큰 위기가 올 것으로 전망됐다.

그런데 총파업 직후 반전이 벌어졌다. 핀란드 일반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최대 중앙노조 에스아꼬(SAK)의 대표 라우리 뤼리가 총파업 후 일주일 만에 노조의 사회협약안을 마련해 다시 제안한 것이다. 그는 자본 편향적 협약을 추진하는 정부의 제안 내용과 방식에 문제가 있지만 사회적 합의 프로세스를 파기하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합의, 시행하는 것이 핀란드 경제와 사회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정부와 고용주 대표들의 전향적 태도 전환을 촉구했다. 이후 핀란드 정부도 노조안의 실효성과 타당성을 긍정하며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던 고용주 단체를 압박해 협상을 진행했고, 우여곡절을 거쳐 2016년 여름, 사회협약이 성사될 수 있었다. 한편, 협약 성사 이후 정년으로 에스아꼬 대표직에서 은퇴한 뤼리는 2017년 봄 지방자치선거에서 사민당 후보로 출마했고, 현재 필자가 사는 땀뻬레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전국 노조 대표의 실용주의적 태도와 주도적 리더십, 그리고 이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끌어내는 정치적 역량이 퍽 인상 깊었다.

북유럽 속의 핀란드: 같은 지향, 다른 경로

서울 시내 한복판을 질주하는 택시들 마냥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돼 버린 듯한 한국 노사 현실을 고려할 때, 핀란드에서는 어떻게 위와 같은 합의 문화가 가능할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 핀란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핀란드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과 더불어 북유럽 국가의 일원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흔히 세계에서 가장 평등하면서도 우수한 공공정책과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바탕에는 비례대표제(proportional representation)와 다당제에 기반을 둔 합의적 민주주의, 그리고 노사정 3자 협의에 기초한 이익 협상 체계를 일컫는 민주적 코포라티즘(democratic corporatism)과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사민주의적 합의 정치, 코포라티즘적 이익 조정 체계, 보편적 복지국가라는 제도적 기둥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북유럽 모델은 시장근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뛰어넘는 제3의 대안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북구 국가들은 ‘극단의 시대’였던 20세기에서 살아남은 가장 뛰어난 정치경제 모델을 보여준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이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평등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나아가 이들은 오늘날 언론의 자유, 청렴성, 시민 참여, 민주주의 만족도, 사회적 신뢰, 행복지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제 지표들에서 매년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의 경제 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등 주기적인 정치경제의 위기들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모델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 혹은 빼어난 회복탄력성을 과시해왔다.

북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핀란드는 한국의 논의에 더 직접적인 영감과 시사점을 제공하는 나라이다. 핀란드는 우리처럼 동과 서 사이에 자리잡은 ‘경계 국가’(border country)로서 20세기에 내전과 전쟁을 겪었고, 전후에는 냉전 질서의 제약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노사 관계에서도 오랫동안 심각한 불신과 대립을 경험한 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노사정 대타협에 이를 수 있었다. 이후 매 2년마다 정부의 중재 하에 이루어진 노사 대표 간 협상과 합의를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은 물론 기본적 사회정책의 방향을 결정해왔다. 이를 통해 파업과 직장폐쇄가 맞서던 대결적 노사관계로부터 전국적 집단 교섭에 기반한 합의적 노사관계로의 성공적 전환을 이루었다. 어떻게 핀란드는 그와 같은 제도적, 문화적 대전환을 이룰 수 있었을까? 핀란드의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아래에서 함께 그 대답을 찾아보자.

합의적 민주주의와 보편적 복지국가를 향하여: 분열에서 합의로

1809년 전쟁에서 패배한 스웨덴이 러시아에 핀란드를 양도한 뒤, 핀란드는 러시아 황제의 지배를 받는 대공국(Grand Duchy of Finland)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일시적인 권력의 공백을 초래했고, 민족주의적 독립 열망으로 고취된 핀란드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신생 독립국 핀란드가 걷게 될 새로운 운명의 세기는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 독립한 지 한 달여 밖에 지나지 않아 내전이 일어났다. 빈곤과 토지문제 등 사회 모순이 심화했지만 부르주아 정당들의 사보타지로 의회에서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러시아 혁명에 고무된 급진 좌파세력들이 모험주의적 쿠데타를 추구한 것이다. 우파 애국주의와 좌파 혁명주의의 에너지가 끓어올라 임계점에서 충돌한 핀란드 내전은 헬싱키, 땀뻬레 등 남부 산업도시 지역을 장악한 좌파의 초기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고 엘리트 장교들을 많이 보유했던 우파(부르주아-중농 연합)의 승리로 귀결됐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의 의사당 광장에 있는 제정러시아 시절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은 핀란드와 러시아의 ’가깝고도 먼’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헬싱키/ 조일준 기자
핀란드 수도 헬싱키의 의사당 광장에 있는 제정러시아 시절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은 핀란드와 러시아의 ’가깝고도 먼’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헬싱키/ 조일준 기자

내전의 상처는 컸다. 1918년 1월 23일 시작돼 약 4개월 간 지속한 내전에서 1만여 명이 죽고, 그 뒤 수용소 캠프에서 질병과 굶주림 등으로 다시 3만여 명이 죽었다. 무엇보다 좌우 이념을 중심으로 계급과 계층 간의 분열과 불신의 골이 깊게 팼고, 이는 20세기 후반까지 핀란드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로 인해 1930년대부터 노사간 대타협을 통해 보편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건설했던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이행 경로를 핀란드는 밟을 수 없었고, 내전 종식 후 50년이 지난 1968년에 이르러서야 노사정 대타협에 기초한 중앙 교섭과 임금 정책 실현을 제도화할 수 있었다.

1918년 내전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시기는 ‘의회 정치의 복원, 그러나 노사관계의 불신 지속’이 특징이다. 핀란드는 1919년 입헌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복원했다. 파시즘 운동 등 우파 독재의 테러와 쿠데타 위협을 무릅쓰고 초대 대통령 스톨베리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입헌적 자유와 다원적 민주주의 질서를 지켜냈다. 특히 사민당은 내전 이후 오래지 않아 정치활동이 복권되면서 1920년대 중반부터 정부 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시기 복지국가를 향한 사회정책과 입법에 일부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내전의 기억 때문에 고용주 단체들은 노동운동 진영을 신뢰하지 않았고, 전국 단위의 단체교섭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시기 핀란드의 노조 조직률도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과 세계를 강타했을 때 핀란드도 소련과 두 차례의 전쟁(1939-40년 ‘겨울전쟁’, 1941-44년 ‘계속 전쟁’)을 치러야 했다. 대외 전쟁은 역설적으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를 냈다. 좌파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회세력이 핀란드 독립을 지키기 위해 함께 싸웠다. 이후 고용주 단체들도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1년 전시 경제체제 아래에서 전국 단위 첫 노사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아직 노사 대타협에 바탕을 둔 사회적 합의의 틀은 마련되지 않았고, 1956년에도 대규모 총파업이 벌어지는 등 불안정한 노사관계가 지속했다.

1960년대 들어 중요한 변화가 시작됐다. 전후 경제재건과 사회발전을 바탕으로 정책결정자들과 지식인들은 스웨덴 등 다른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발전 경로와 이론적 논쟁에 눈길을 돌렸다. 뻬까 꾸시가 쓴 팜플렛 책자 <60년대의 사회정책>(60-luvun sosiaalipolitiikka)은 이론적, 정책적 가이드를 제시한 핵심 저술로 꼽힌다. 저자는 스웨덴 복지국가 이론과 경험에 관한 검토를 바탕으로 민주주의, 사회적 평등, 경제 성장 사이의 선순환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1956년 집권한 중도우파 출신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도 노사대타협을 통한 사회통합의 필요성을 적극 인식하고 이를 강력한 정치적 의지로서 뒷받침했다. 1966년 선거에서 사민당이 승리하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좌파 세력의 영향력이 증가했다. 사민당과 공산당 지지 그룹으로 갈려 대립과 반목을 겪던 노동운동 내부의 분열도 사민주의적 방향으로 상당히 정리됐다. 물가급등에 따른 환율 ? 재정위기 속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도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당시 사민당 총리 라빠엘 빠아시오 내각이 주도해 노사정 대표들로 구성된 3자 협의체를 만든 뒤, 전국적인 임금 인상률과 주요 경제, 사회정책의 방향을 논의했다. 협상은 1968년 마우노 꼬이비스또 총리 시기에 결실을 맺어 역사적인 첫 노사정 합의를 도출했다. 1968년 노사정 합의는 노동시장에서 지위가 약했던 노동자의 위상을 강화해 새로운 권력 균형을 만들어냈다. 1968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핀란드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사회정책에 입각해 보편적 복지국가 체계를 완성했다. 사민당과 중앙당은 이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정당 정치 세력들로 자주 연정을 이루어 서로 경쟁, 연대하며 복지국가 팽창을 이끌었다. 대도시 노조 기반의 사민당이 포괄적이지만 임금 노동 중심의 사회보험과 복지 서비스를 선호한 반면, 정규적 노동시장 외곽에 존재하는 농민과 산림업종사자, 농촌 주민 등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중앙당(구 농민당)은 보편주의적 복지 체계를 선호해 왔다. 보편주의적 사회권 기반 시민권(citizenship) 모델과 임노동 연계 복지(workfare) 모델은 핀란드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 녹아들어있는 두 개의 핵심 원칙이다. 주요 정책 실행 및 입법 과정에 두 원칙이 함께 결합돼있다.

노사정 3자 이익 협상 체계의 확립은 핀란드 민주주의의 정치적 안정에도 기여했다. 극단적 다당제에 기반해 가장 파편화된 정당체제를 운영하던 핀란드는 잦은 정국 불안정으로 정부의 임기가 매우 짧은 나라였다. 노사 대타협과 이를 추동한 중앙당-사민당 연합 정치는 정국 안정에도 기여해 1983년 이후 대부분의 정부가 4년 임기를 채우는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사민당의 깔레비 소르사 총리는 다양한 이익단체 대표들과 정치행위자들이 참여하는 꼬르삐람삐 컨퍼런스를 설립해 공동의 이해 증진을 도모했다. 이러한 변화들과 더불어 합의적 정책결정과 정치문화가 보편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의 변화: 경제 위기와 사회적 코포라티즘의 강한 생명력

1990년대 초반 핀란드에 다시 중대한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80년대 말의 부동산 버블과 은행권의 금융 위기에 이어 1991년의 소련 해체로 인해 심각한 경기침체가 발생한 것이다. 특기할 것은, 1930년대 이래 최대의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의 3자 협의 체계는 중단 없이 지속한 것이다. 오히려 대외적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노동시장의 주체들은 노사정 3자 합의의 틀을 활용하고자 했다. 핀란드 정부는 이 시기 이후 초다수(super-majority)적 연합을 추구하는 ‘무지개 연정’(rainbow coalition)이 일반화되었고, 전국 단위의 임금 정책 및 주요 사회정책 방향에 관한 노사정 합의는 2년 혹은 3년을 주기로 갱신되면서 지속됐다. 핀란드는 재정 긴축과 일부 복지 수당 및 서비스 축소, 그리고 산업구조의 질적 개혁을 단행하며 전환의 터널을 통과했고, 노키아 주도 지식정보경제로 탈바꿈해 1990년대 중반부터 약 10여 년간 경제 성장과 활황을 경험했다.

2000년부터 12년을 재직한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앞줄 오른쪽) 시절, 핀란드는 국가청렴도, 국가경쟁력, 교육경쟁력 1위 국가로 올라섰다. 핀란드의 ’국민엄마’로 불렸던 할로넨 대통령의 2012년 퇴임식 장면. 도서출판 북하우스 제공
2000년부터 12년을 재직한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앞줄 오른쪽) 시절, 핀란드는 국가청렴도, 국가경쟁력, 교육경쟁력 1위 국가로 올라섰다. 핀란드의 ’국민엄마’로 불렸던 할로넨 대통령의 2012년 퇴임식 장면. 도서출판 북하우스 제공

2007년에는 산업 부문의 이익과 고용주 단체를 대표하는 에꼬(EK)가 전국 단위 노사정 협상을 중단하고 산별 및 지역 단위 협상만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1980년대 스웨덴 고용주 대표 단체가 사회적 코포라티즘의 정책 협의 틀을 거부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핀란드 또한 스웨덴의 경로를 밟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11년 보수당과 사민당을 비롯한 6개 정당 연합정권이 새로 들어선 뒤 에꼬(EK)는 다시 노동조합 대표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마라톤협상을 벌였고, 포괄적 임금 정책 방안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 당시 2008년 유럽재정 위기 이후 핀란드 경제의 어려운 여건과 이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강한 압박이 있었다. 노사정 대표들은 2013년에도 새로운 사회협약에 동의했다. 2015년 유하 시삘라 정부가 추진한 ‘생산성 향상을 위한 사회협약’은 좌초 위기를 겪었으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최대 중앙노조 대표의 인내와 주도적 리더십에 힘입어 2016년 여름에 최종 합의, 시행되었다.

2017년 한국의 노사관계,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20년을 맞이한 2017년 한국 사회는 다시 한 번 중대한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 주권자의 염원을 배경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헌법과 정치제도 개혁부터 북핵 위기 극복과 한반도 평화·공존 체제 수립까지 어렵고 중차대한 임무들을 부여받고 있다. 그 가운데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 지속가능한 복지국가의 건설과 더불어 노사간 신뢰와 합의에 기초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및 사회정책 거버넌스의 구축은 매우 본질적이며 중요한 새 정부의 국정과제라고 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극복 과정에서 시작된 노사정위원회 등의 사회적 대화 기제와 이를 통한 사회적 합의 창출 시도들은 제도적, 정책적 기반이 형해화된 형국이다. 지난 9년간의 보수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자본 중심의 편향된 합의 종용, 노동계의 반발과 불신 심화, 협약 파기와 장외 투쟁의 패턴이 반복된 결과이다. 국가주의적 권위주의의 유산, 재벌 중심 경제와 부패한 정경유착의 관행, 과잉 이념화된 노동운동, 아이엠에프 위기 이후 급진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정책 등 안팎의 제약으로 인해 민주화 시대에 걸맞은 사회적 이익 조정 체계를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다.

포용적 성장과 노동존중 사회를 약속하며 새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일자리 만들기, 최저임금 인상 등의 공약 과제와 더불어 새로운 노사정 관계 구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노?사, 노?정 간의 높은 불신과 대립, 낮은 노조 조직률과 기업별 단체교섭 시스템,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간의 균열과 편차, 여성·청년·노인 등 노동시장 편입이 어려운 다수 인구 집단의 존재 등 해법을 찾아야 할 과제들이 산적하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 등 일과 노동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적, 사회적 변동의 가능성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노사관계의 대전환과 실용적, 합의적 정책 접근을 통해 안팎의 도전 과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배경이자 최근 많은 사람이 북유럽 모델에 관심을 쏟는 이유이다.

특히, 국제관계의 불리한 여건과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불신을 딛고 20세기 후반 대결적 노사관계로부터 합의적 노사관계로의 대전환을 일구어낸 핀란드의 경험은 한국의 정책결정자들과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대통령과 정부의 적극적 의지와 정치적 뒷받침, 노조를 대화 상대이자 노동시장의 핵심 파트너로 받아들인 고용주 단체, 책임성과 주도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전국 중앙노조와 그 대표들, 연정을 통해 보편적 복지국가 발전을 주도한 정당들과 그 바탕의 비례대표제 기반 다당제 정치체제 등이 모두 어우러져 또 하나의 북유럽 모델, 20세기 핀란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여정을 밝혀주었다. 극단적 사회 양극화와 불신의 그늘 아래 수많은 시민이 고통받는 2017년 한국의 현실을 타개할 비상한 의지와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새로운 집합적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 대학교 정치학박사, 미래세대정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hyeon.su.seo@uta.fi




원문보기: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다른백년 주간논평 2017.7.11.]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Tampere) 대학교 연구원(정치학 박사). 변화하는 의회-시민 관계를 중심으로 대의 민주주의와 대안적 형태의 시민 참여 사이에 나타나는 정치적 긴장과 다이내믹을 연구 중. 핀란드와 북유럽의 정치제도 및 복지국가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
지난 5월, 핀란드의 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토가 사망했다.
핀란드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었던 그는 재임 중 복지국가, 개헌, 중립평화외교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립 100년 만에 이뤄낸 핀란드의 성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의 재임 중 성과를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눠 2회에 걸쳐 싣는다. 
1. 국내정책 편: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최근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독일 방문 기간 동안 문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 중국 시진핑 주석, 일본 아베 총리,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등과 연속 회담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북핵 등 한반도 위기를 해결할 방법으로 ‘단계적, 포괄적 접근’과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해 트럼프 대통령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서도 한중관계의 회복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협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0510003365_0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한미정상회담과 G20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정책의 운전대를 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북핵 등 한반도 주변 정세는 여전히 녹록치 않다 (이미지 출처: http://www.segye.com/)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독일 메르켈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진전, 그리고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에 대한 공통의 관심을 피력했다.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 ‘베를린 평화구상’(2017.7.6.)을 발표해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 추진,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등 핵심 정책방향과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비상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뒤 신속하고 광범위한 개혁 의제 선점을 통해 초기 높은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받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이로써 복잡하고 어려운 위기 상황의 한반도 국제정세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보편적, 민주적 가치에 기반한 ‘유능한 협상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따른 긴장 고조는 물론 의회 내 다수의석을 점하지 못한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개혁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 등 새 정부가 당면한 과제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쉽지 않은 국제, 국내 정치의 조건 속에서 한반도 평화공존체제 수립과 합의적 민주주의 구현 등 핵심 개혁 과제들을 어떻게 실현해 갈 것인가?

daac2a0d7f8a82a18d37c2477d5aafbc
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100년 전 독립을 이룬 핀란드는 100년 만에 복지국가와 중립적 대외정책을 확립했다.

20세기 동안 내전과 대외적 전쟁,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분열 등을 지혜롭게 극복한 핀란드의 역사적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최근 세상을 떠난 한 전직 핀란드 대통령의 삶과 행동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를 보여준다.

독립 100주년, 핀란드인들이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의 죽음

2017년 5월 12일(금) 21시 15분, 핀란드 제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토(Mauno Koivisto)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다음날 핀란드 전역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가 게양되었다.

20170711_154526
제9대 핀란드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토의 초상화. 그는 올해로 독립 100주년을 맞은 핀란드에서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이었다.

현 대통령 사울리 니니스뙤(Sauli Niinistö)는 추모 성명을 발표했고, 공영방송 YLE는 하루 종일 추모 방송을 특집으로 편성해 내보냈다.
핀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한 대통령으로 인정받는 꼬이비스토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2회 연임). 전후 25년간 장기 집권했던 중앙당(Keskusta, The Centre Party)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Urho Kekkonen, 1956-1981년 재임)이 기력이 쇠해 사임할 당시 그는 사민당(SDP)-중앙당 연합정부의 총리를 맡고 있었다.
1982년 대통령 선거에서 폭넓은 지지로 당선되며 향후 30년간의 사민당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소련 붕괴, 경제위기, 유럽통합 등 대전환기에 핀란드를 이끈 그는 지혜롭고 합리적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1994년 퇴임한 뒤 부인 뗄레르보 꼬이비스토(Telervo Koivisto) 여사와 함께 시골집에서 숲과 정원을 가꾸며 소박한 삶을 이어가는 한편, 후임 아흐띠사리(Martti Ahtisaari, 1994-2000 재임), 할로넨 (Tarja Halonen, 2000-2012 재임) 대통령과 정부에 국제관계와 외교정책 등에 관해 조언하며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과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가 실용적 리더이자 독립적 지성인이면서 매우 소탈하고 겸손했던 정치인으로 진실로 ‘전 국민의 대통령’(koko kansan presidentti)이자 ‘나의 대통령’(minun presidentti)이었다며 슬픔과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평생 손으로 하는 노동과 작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 국제관계 분야에 두루 정통하여 깊이 숙고하고 사유하는 것이 몸에 밴 사상가이자 저술가로 ‘철인왕’(philosophy king)에 종종 비유될 정도였다.
평생 배구를 즐겨한 그의 두 손은 노동과 사유 둘 다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꼬이비스토는 핀란드가 내전과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2차 세계대전 및 전후 냉전 질서가 부과한 국제정치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오늘날의 성숙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적 국제관계를 달성하는데 기여한 탁월한 정치가였다.
20세기 핀란드의 현대사 굽이굽이를 지나온 뒤 독립 100주년인 2017년에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신생 민주공화국 핀란드의 첫 세기를 증언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어린 목수, 참전군인, 철학박사, 재무장관, 중앙은행장, 총리, 그리고 대통령의 삶

마우노 꼬이비스토는 1923년 핀란드 남서부 항구도시 뚜르꾸(Turku)의 한 가난한 조선 노동자(배 목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 황제 치하의 대공국(Grand Duchy of Finland) 지위에서 갓 벗어난 신생 독립국이었다. 독립 직후인 1918년에는 좌우 내전이 발발해 약 4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정치적 분열과 적대의 상처는 핀란드 사회를 깊이 갈라놓았다.
열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고, 초등학교를 마친 뒤부터 항만에서 여러 일을 익히느라 꼬이비스또의 유년기는 짧게 끝났다.
16세이던 1939년에는 소련의 침공으로 이른바 ‘겨울 전쟁’(Talvisota, 1939-1940)이 시작됐다. 어린 꼬이비스또는 소방의용군에 편입된 뒤 전방 부대에 배치돼 ‘계속전쟁’(Jatkosota, 1941-44)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생사가 엇갈리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그는 정신적(종교적) 전환을 경험한다. 전쟁은 또 그가 세계정세에 눈뜨도록 만들었다.

20170711_154554
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했을 때 꼬이비스토는 16세였다(왼쪽 사진). 전쟁은 어린 청년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싸우게 했고, 세계정세에 눈뜨게 했다. 오른쪽 사진은 전후 대학생이 된 꼬이비스또의 모습.

전쟁이 끝나고, 유공자로 전역한 꼬이비스토 앞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그는 1947년에 핀란드 사민당에 가입했고, 항만 노동조합에서도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했다.
당시 노동조합은 사민당과 공산당 활동가들로 진영이 갈려 파업 전략 등을 두고 노선 투쟁이 치열했다. 사민주의 노선을 추구한 꼬이비스또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꼬이비스토는 1947년부터 야간 학교를 다니며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했고, 이후 대학에도 입학했다. 교직 활동을 병행하며 학업을 계속한 끝에 1956년 ‘뚜르꾸 항만의 사회적 관계들’을 주제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70711_154612
전역 후 노조와 직업 활동을 병행하면서 꼬이비스토는 공부를 계속해 1956년 뚜르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에는 향후 65년 간 평생을 함께 하며 가장 중요한 조언자가 되어준 부인 뗄레르보(Telervo Koivisto)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학위 취득 후 꼬이비스토는 1957년 헬싱키노동자저축은행(Helsingin Työväensäästöpankki)의 대표 자리를 제안받고 헬싱키로 이주한다.
이후 12년간 저축은행 대표 역할을 맡은 그는 경제 전문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사민당이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둔 1966년에는 재무장관에 발탁됐다.
1968년 핀란드 중앙은행장에 임명된 직후에는 총리로 다시 임명됐다.
께꼬넨 대통령 집권 시기에 성립된 사민당-중앙당 연합정부에서 총리(1968-1970, 1979-1982)와 재무장관(1966-67, 1972)직을 두 차례씩 역임한 그는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독립적 사유와 숙고된 판단을 중시하는 그는 강한 카리스마로 정치적 도전자를 잘 용납하지 않는 께꼬넨 대통령과 오래 호흡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내각에서 물러나 있는 사이에도 핀란드 중앙은행장으로 계속 활동했고, 이 시기 그가 획득한 경제와 재정 정책의 전문성은 경기 과열과 대소 무역의 붕괴 등으로 인해 그의 대통령 재임 후반기에 발생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경제 전문가였던 그의 재임 시기에 경제위기가 발생, 심화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소련 붕괴가 가져온 경제적 충격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환율 정책에 신중한 나머지 1980년대 후반의 인플레 현상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된다.)

핀란드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이끌다

그가 처음 총리로 임명된 1968년, 은 20세기 후반 핀란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핀란드 역사상 최초로 노사정 대표가 3자 협의체를 구성해 전국적인 임금 인상률과 주요 경제, 사회정책의 방향을 결정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임 빠시오(Rafael Paasio) 총리 때부터 추진된 협상은 꼬이비스토가 총리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결실을 맺었다.
1930년대부터 3자 합의에 바탕해 보편적 복지국가로 이행한 스웨덴, 덴마크와 달리 핀란드는 북유럽 국가이면서도 내전과 대소 전쟁 등의 여파로 같은 경로의 발전이 한 세대 동안 지연되었다.
사용자들은 노조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자주 총파업 등 물리적 투쟁으로 맞섰다. 내전 뒤에도 좌우 대립은 계속됐다. 나아가, 각 진영 안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들 간에 치열한 논쟁과 대결이 벌어졌고, 정국은 자주 소용돌이쳤다.
대소 전쟁 등 국가적 위기를 거치면서 민족적 단합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용자단체와 노조 간의 단체 협상이 개시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께꼬넨 대통령이 첫 취임한 1956년에도 대규모 총파업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지속됐다.

20170711_154642
1968년 노사정 합의를 계기로 핀란드는 민주적 코포라티즘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건설했다. 사진은 당시 역사적 합의를 도출한 노사정협의회 회의 장면.

그렇다면 1968년의 제도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중도우파로서 안정된 대러시아 관계 구축과 국내 사회통합에 역점을 둔 께꼬넨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정치적 뒷받침, 경기 인플레 등에 기인한 환율 재정위기라는 외부요인이 부과한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 196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사민당의 주도적 역할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 가능했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신조합주의(neo-corporatism)적 3자 이익 협상 체계가 제도화되었다. 일시적 중단 사례가 있지만 큰 틀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제도가 지속되면서 핀란드 노동시장 및 관련 사회⦁경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제가 되고 있다.
노사관계의 안정과 고속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핀란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고용, 주거, 교육, 의료, 사회보장 등의 영역에서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복지국가 관련 법제와 정책들을 완비할 수 있었다.
꼬이비스토가 각료와 총리로서, 나아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한 시기에 핀란드 사회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목도했던 것이다.

의회주의와 현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

핀란드가 또 하나의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해가는 과정은 분열과 대결을 특징으로 하던 ‘캠프 정치’(camp politics)의 시스템과 문화가 ‘합의 정치’(consensus politics)로 전환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역사적, 지정학적 여건과 선거제도의 영향 등으로 핀란드의 정치 체제는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정당 시스템과 ‘진영 정치’의 양상을 보였다. 준(準)대통령제 시스템 속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때때로 내각과 의회를 해산했고, 정치적 교착으로 인해 관료 내각이 들어서는 경우들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된 적록연정(punamultahallitus, 사민당-중앙당 연정)과 중앙 노동조합 조직들의 통합, 그리고 노사정 3자 협상의 제도화 등에 힘입어 핀란드 정치 시스템은 점차 안정돼 갔다.
특히 1982년 마우노 꼬이비스토의 대통령 취임 이후 중요한 정치적, 입헌적 개혁들이 시행됐다.
전임자 께꼬넨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이고 의회와 내각 중심의 국정 운영을 촉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부터는 소련의 반대 등으로 27년간 내각에 참여하지 못했던 보수당(Kokoomus)이 사민당과 ‘블루-레드 연정’(sinipunahallitus)을 통해 집권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는 이른바 ‘무지개정부’로 불리는 초다수적 연합정부 (super-majority seeking coalition government) 수립이 일반화되었다.
꼬이비스토의 재임 시기에 헌법개혁위원회가 출범해 바람직한 헌법 개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 제안했고,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점진적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우선, 그동안 300명의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전환돼 시민 참여가 대폭 확대됐다.
둘째, 대통령의 임기 제한 규정을 마련해 6년씩 2회(최대 12년)만 역임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1995년 핀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에 맞추어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전면 개정해 <유럽인권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 부합되도록 개편했다.
개정 헌법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근대적 주권 원칙에 기반한 시민권 모델을 뛰어넘어 보편적 인권 원칙을 헌법과 기본권 보장의 기본 원리로 수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기존의 부분적 개정 내용들을 집대성하고, 나아가 권력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전면적 헌법 개혁이 단행됐다. 회기를 달리한 두 차례의 의회 동의를 거쳐 2000년부터 발효된 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대신 의회와 총리의 권한을 강화했다.

20170711_154654
꼬이비스토의 재임 시기 핀란드는 의회주의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 헌법 전면 개혁이 단행됐다. 사진은 1980년대 이후 핀란드의 전현직 대통령들과 그 배우자들이 2012년 12월 6일 독립기념일 파티에 참석한 모습.

가장 중요한 변화는 총리 인선과 내각 구성의 권한이 대통령으로부터 의회로 이양된 것이다. 총리와 내각은 대통령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벗어나 의회에서 선출, 구성되고, 총선 결과를 반영해 원내 정당들 간의 협상을 거쳐 다수결로 선출되는 총리는 내각과 행정부의 운영에 대해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책임지도록 했다.
아울러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에도 중요한 제약이 가해졌다. 대통령은 여전히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고,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 기능은 형식적 절차의 차원으로 국한됐다.
대통령의 정부 정책에 대한 통제, 특히 께꼬넨 이래 대통령의 배타적 권한 영역으로 인식되던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중요한 개혁 조치가 취해졌다. 외교 정책에서도 정책 주도권이 총리와 내각으로 넘어간 것이다.
2000년 헌법 개정 이후 핀란드의 헌정 체제는 형식적으로는 준대통령제(semi-presidentialism)이지만 실질적 측면에서 표준적 형태의 의회주의(parliamentarism)로 전환되었다고 정치학자들은 평가한다.
최근 2012년의 헌법 개정은 의회주의적 권력 구조 개편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유권자 5만 명 이상이 서명한 경우 의회가 그 입법 정책안을 심의하도록 하는 시민발의제도(citizens’ initiatives)를 도입해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했다.
그 자신 한 번도 국회의원이었던 적이 없었던 꼬이비스토가 의회중심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일견 역설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정당 내부에서 커리어를 쌓아간 기성 정치지도자들과 다른 경로를 통해 장관과 총리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전임 대통령과 달리 소수의 측근들로 구성된 권력의 요새를 구축하지 않았고, ‘올드보이들’ 간에 벌어지는 폐쇄적 권력 투쟁 성격의 정치행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의회와 제 정당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께꼬넨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퍼져있었고, 이는 의회주의적 헌법 개혁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합의와 추동력을 제공했다.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2), 대외정책 편은 다음에 계속)
(이 글의 저자인 서현수 박사는 지난 5월 핀란드 땀뻬레대학에서 핀란드의 의회정치와 시민참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여기(☞Reaching Out to the People)를 클릭해 다운받을 수 있다). 

기본소득의 정치학: 핀란드는 왜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나?


[다른백년 주간논평, 2017.1.23.]


핀란드는 왜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나?

기본소득의 정치학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Tampere) 대학교 연구원(정치학 박사). 변화하는 의회-시민 관계를 중심으로 대의 민주주의와 대안적 형태의 시민 참여 사이에 나타나는 정치적 긴장과 다이내믹을 연구 중. 핀란드와 북유럽의 정치제도 및 복지국가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

2017년 새해, 핀란드 정부의 기본소득제도 도입을 검토하기 위한 2개년 정책 실험(2017-2018)이 시작되면서 국내외에서 높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왜 핀란드 정부는 기본소득의 도입을 검토하는 정책 실험 프로젝트를 시작했는가?
제도의 설계, 실행, 효과의 측면에서 핀란드 정부가 실험하는 기본소득 프로젝트의 내용과 성격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주요 정당 및 노조, 경영자조직 등 핵심 이해관계자들은 정부의 실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프로젝트가 검토하게 될 기본소득의 모형과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에 기초한 현 사회보장 시스템의 차이는 무엇이며, 양자 간의 이질성과 차이가 어떻게 조정될 수 있는가? 핀란드 정부의 기본소득 실험 프로젝트가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기본소득 논의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3404881_hWF
핀란드 우파정부는 2017년 국민국가 수준에서는 세계 최초로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다. 기존의 복잡한 복지전달체계의 관료주의를 혁파하는 것이 주요 목표이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복지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의 현실에서 핀란드의 정책실험을 일방적으로 찬양 또는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지 출처: KBS)

지면의 제약과 이제 막 프로젝트가 시작된 시점임을 고려할 때 여기서 위 질문들에 상세한 답변을 제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에 대한 개괄적 묘사에 머물고 있는 미디어들의 보도 수준을 넘어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정책 연구와 사회적 토론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 글은 그 물꼬를 트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공상’에서 ‘구체적 정책’으로 – 최근 유럽의 기본소득 운동들

2015년 총선을 통해 집권한 유하 시삘라(Juha Sipilä) 총리가 이끄는 보수 우파 연합정부 – 중도우파인 중앙당(Centre Pary), 보수 국민연합당(National Coalition Party), 민족주의 포퓰리스트 핀란드인당(Finns Party) 연립정부 – 는 2015년 8월 기본소득 실험을 4년의 정부 임기동안 추진할 공식 정책 프로그램의 하나로 채택했다.
당시 스위스에서 매월 성인 한 명당 2,500프랑 (한화 약 300만원)의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공하자는 시민 발의(citizens’ initiative)가 국민투표에 부쳐진 직후였다. 발의안은 경제와 사회보장 시스템에 대한 부정적 효과를 우려한 스위스 의회 상하원의 기각 권고 결정에 이어 국민투표의 결과도 찬성 23.1%, 반대 76.9%로 부결되었다.

AKR20160606003751088_01_i
2016년 6월, 스위스는 성인에게 매월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650스위스프랑(약 78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안을 두고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부결됐다.

그러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적 삶을 영위하고 공적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무조건적 기본소득’ (unconditional basic income)을 도입하자는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적 캠페인은 뜨거운 공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상당한 시민적 지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비슷한 시기, 스위스 시민발의에 영향을 받아 진행된 ‘무조건적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유럽 시민발의’(European Citizens’ Initiative for an Unconditional Basic Income)도 285,041 명의 지지 서명을 받았다. 7개국 이상에서 1백만 명 이상의 서명을 요구하는 유럽연합의 절차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EU 집행위원회의 공식 심의 자격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 또한 괄목할 성과를 낳은 캠페인으로 평가받았다.
2012년부터 시민 5만 명 (핀란드 인구의 약 0.9%) 이상이 서명한 법안이 의회에 제출, 심의될 수 있게 허용하는 시민 발의제도가 입법, 시행된 핀란드에서도 2013년 기본소득 도입을 요구하는 시민 발의안이 제기돼 21,634명의 서명을 모은 바 있다.
이들 일련의 흐름은, 토마스 모어(1478~1535년)와 토마스 페인(1737~1809년) 등이 기본 소득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래 수 세기 동안 근대 산업사회적 복지 민주주의의 외곽에 유토피아적 관념으로 머물던 보편적 기본소득 혹은 시민 임금(citizen income)의 아이디어가 실천적 잠재력을 지닌 구체적 사회정책 의제로 인식되는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핀란드는 네덜란드와 더불어 현재 유럽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흐름에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나라이다. 네덜란드는 19개 이상의 지방자치단체가 기본소득 제도를 실험할 의사가 있음을 천명한 상태이며, 2017년부터 우트레흐트 등 일부 지자체가 구체적인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반면, 2017년부터 실시되는 핀란드 정부의 기본소득 실험 프로젝트는 국민국가 수준에서 정부 주도하에 시행되는 최초의 기본소득 관련 정책 실험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미디어와 정책 결정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네덜란드의 기본소득 논의가 지자체와 지역 정당 및 시민사회 등 아래로부터(bottom-up) 주도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반해, 핀란드는 총리와 행정부의 이니셔티브로 공적 논의가 급진전된 위로부터의(top-down) 혁신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핀란드의 기본소득 논의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의제인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2013년 시민발의 캠페인을 비롯해 이미 1980년대부터 13차례에 걸쳐 학자들, 시민사회 단체와 활동가들, 사민당, 녹색당(Green League), 좌파동맹(Left Alliance), 중앙당 등 주요 정당들의 다양한 기본소득 도입 제안들이 있었다 (Koistinen, P., & Perkiö, J. 2014. Good and Bad Times of Social Innovations: The Case of Universal Basic Income in Finland. Basic Income Studies, 9(1-2): 25-57 참조.).
이 제안들은 당시에는 현실적 정책 대안들로 주목받거나 크게 공론화되지 못했지만, 최근 스위스 국민투표 등 계기를 만나면서 핀란드 정부가 정책 실험을 감행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핀란드 정부의 기본소득 실험 모델: 주요 내용과 비판

기본소득 실험 프로젝트의 주관기관으로 선정된 핀란드 사회보험청(Kela)는 2015년부터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실험 설계를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보고서에서 제안된 내용을 바탕으로 주요 정책 이해관계 집단의 의견을 수렴한 뒤, 핀란드 사회보건부(STM, Sosiaali- ja terveys ministeri)는 기본소득 실험 법안(HE 215/2016 vp)을 기초해 2016년 8월 의회에 제출했다.
2016년 12월 의회에서 승인된 이 법안에 따르면, 이번 실험의 기본 목표는 실효성있는 기본소득 모델의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1) 기존의 사회보장 시스템을 노동 형태의 변화에 더 잘 조응하도록 개선하는 것,
2) 실업수당에 의존하도록 하는 유인 요소를 줄임으로써 실업자들의 노동시장 참여를 활성화하는 것, 그리고
3) 관료주의를 줄이고 지나치게 복잡한 사회보장 수당 체계를 단순화하는 것 등이 핵심 목표로 제시된다.
이를 위해 핀란드 정부는 2016년 11월 기준 사회보험청(Kela)으로부터 기본 실업수당(basic unemployment allowance) 또는 노동시장 보조금(labour market subsidy)을 받고 있는 만 25~58세의 사람들 중 2,000명을 무작위 선발해 2017년부터 1월 1일부터 2018년 12월 31일까지 2년 간 매월 560유로(약 70만원)의 기본소득을 별도의 자산 조사 없이 지급한다.
곧, 기본소득 프로젝트 대상으로 선발된 2,000명에게 자동적으로 매월 560유로가 2년 간 지급되며, 이 금액에 대해서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지급된 기본소득은 기존의 실업수당을 대체하지만, 그 외에 참가자가 받는 다른 사회보장 급여나 수당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울러, 실험 참가자가 프로젝트 기간 중 취업에 성공하는 경우에도 기본소득은 계속 지급된다.
무작위로 선발된 사람들의 실험 참가 여부는 선택적이지 않으며, 지역적 수준의 실험은 따로 시행되지 않는다. 표집 집단 2,000명에 대한 실험 결과는 전체 모집단 173,000명과 비교 조사되며, 2019년에 연구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지난 1월 9일 첫 개월분 급여가 이루어졌고, 다음 달부터는 매월 2일에 지급될 예정이다.

1
핀란드 사회보험청(Kela) 주관으로 2016년 11월 핀란드와 네덜란드 연구자들이 모여 두 나라의 기본소득 실험에 대한 비교 세미나를 개최했다. 사회보험청의 기본소득 실험 프로젝트 책임자인 Olli Kangas 박사의 핀란드 실험 모델 발표 장면.

이쯤에서 독자들에게는 많은 질문들이 떠오를 것이다. 왜 560유로인가? 이 액수가 핀란드 사회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왜 사회보험청으로부터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는가? 왜 2,000명인가? 
우선 560유로라는 숫자는 사회보험청(Kela)에서 기본 실업수당 또는 노동시장 보조금을 받는 사람들에게 매월 정액 지급되는 금액 약 700유로에서 20%의 세금을 제외한 금액과 동일한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선발된 참가자 개인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고 의무적(compulsory)으로 실시되기 때문에 참가자들이 받던 기존의 소득 지원금보다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설계된 것이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핀란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할 때 이 금액만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액수는 아니며, 따라서 이번 기본소득 실험 모델은 전면적(full)이 아닌 부분적(partial) 기본소득 실험으로 분류된다.
Kela와 연구진들은 기본소득 실험 대상 그룹과 급여 액수를 다양하게 설정하여 참가자들의 행동 유형과 결과를 실험해보려 했으나 이는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의 침해의 우려가 있고, 촉박한 일정의 압력 속에 실험 설계가 더 복잡해진다는 이유로 조정되었다.
프로젝트에 책정된 정부 예산의 규모(2년 간 총 2천만 유로)도 실험 설계에 중요한 제약을 가했다 (사회보험청이 의뢰한 연구 보고서의 작성자들은 10,000명의 샘플 집단 규모를 권고했다.).
이로 인해 일반 직장인들은 물론 월 300 유로 내외의 학생 수당(student allowance)을 받는 학생과 25세 이하의 청소년, 그리고 실험보험기금으로부터 임금 연계 실업수당(Earning-related income allowance, 실직 전 임금의 60~80%에 해당하는 액수를 500일 (100주) 간 받을 수 있음)을 받는 초기 실업자 등 다양한 사회 집단이 실험에서 제외되었고, 이는 여러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정부 법안에 대한 주요 단체들의 비판을 짧게 소개하면, 핀란드 기본소득네트워크 (BIEN Finland)는 정부 법안에 대한 의견서에서 기본소득이 단지 변형된 실업보조금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했다.
청소년 단체인 Allianssi는 독립 생활하는 15~24세의 청소년과 학생 등 교육제도와 노동시장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중요한 사회 그룹에 대한 기본소득의 영향을 실험하지 못하게 된 점을 비판했다.
핀란드 산업연맹 EK는 세금 조정 없이 부분적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한된 그룹의 참가자에게 제공하는 이번 실험이 제대로 된 기본소득 모델이 아니며, 실업수당 외에 주거수당 등 다른 사회적 수당을 함께 다루지 않아 관료주의를 줄이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반면, 핀란드 노조를 대표하는 SAK, AKAVA 등은 개인의 사회보장 수준을 심각하게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기본소득으로 소득연계 사회보장이나 기타 지원 수당들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비판하면서, 기본소득의 도입보다 현 사회보험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복지전달체계의 관료주의 철폐가 핵심 목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번 프로젝트가 복잡한 사회보장 시스템을 단순화하고 관료주의를 줄이면서 장기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더 쉽게 변화된 노동 형태를 받아들이게 해 고용률을 제고하려는 중도 우파 정부의 보수적 정책 지향에 부응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역사적 굴곡을 거치면서 완성된 핀란드 복지국가 모델은 매우 포괄적이면서 복잡한 사회보장 시스템을 갖고 있다.
투명하고 공정한 조세 체계에 기반해 교육, 의료, 주거, 환경, 복지 등의 제 영역에서 수준 높고 평등한 사회보장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아동수당, 모성/부성/부모수당, 학생수당, 실업수당, 징병수당, 주거수당, 질병수당, 산재수당, 장애수당, 재활수당, 생존자수당, 국민(노인)연금 등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개인이 필요로 하는 물질적 지원을 보편적으로 혹은 소득 수준 등에 비례해 현금(또는 현물) 지원한다.

사진 2_Juha Sipila government and the Finnish model of corporatism
유하 시삘라가 이끄는 우파 연합정부는 경제위기 극복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사정 사회적 협약을 추진했다. 사진에서 왼쪽 두 번째가 유하 시삘라 총리, 그 옆으로 재무부장관과 노동계 및 경영계 대표들이 도열해 있다. (출처: www.kauppalehti.fi, 2015.9.28)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각종 수당 신청의 자격 여부를 심사할 중간 행정 조직과 절차가 불가피하게 팽창되었고,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과 관료적 절차의 틈바구니에서 자칫 장기실업으로 이어지는 물적, 심리적 유인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2008년 유로존 국가들의 재정위기, 핀란드 경제를 선도해온 노키아의 부침,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유럽 안보 위기로 인한 대러시아 무역의 침체 등이 맞물리면서 10년 가까이 핀란드 경제가 사실상 제로 성장 상태에 머물러 있어 실업을 줄이고 고용률을 제고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 정책 목표가 되고 있다.
사민당과 녹색당, 좌파 동맹 등 진보 정당들이 신자유주의적 긴축 재정과 복지 축소 정책의 폐해를 비판하는 반면, 중앙당과 보수당 등 우파정당들은 공공섹터의 비효율성과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줄이는 방향의 복지, 행정 개혁을 선호하고 있다.
특히, 이번 기본소득 정책 실험을 주도한 중앙당의 유하 시삘라 총리는 그 자신 성공한 IT 벤처 기업가 출신으로 시장주의적 정책 대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야당 대표이던 시절 향후 10년 간 생산성 향상을 통해 공무원 수를 2만 명 이상 줄일 수 있다고 호언해 진보정당들과 노조의 강한 반발을 샀던 일도 있다. 관료주의를 줄이는 것이 왜 이번 기본소득 실험의 주요 목표로 설정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단서다.
사실 현 총리와 내각의 신자유주의적 성향과는 별개로, 구 농민당(Agrarian Party)의 뒤를 이은 중앙당(Centre Party)은 전통적으로 도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수 국민연합당(NCP)이나 도시 산업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민당(SDP)과 달리 중소자영농과 산림업 종사자, 그리고 북동부 시골 지역 주민들을 핵심 지지층으로 해 왔다.
전간기와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민당과 자주 연합정권을 이끌며 핀란드 복지국가 모델을 완성시킨 주요 정치세력으로 21세기인 오늘날까지 북유럽의 농민당 계열 정당들 중 가장 높은 영향력을 자랑하는 독특한 사례이다.

사민당+농민당(중앙당)에 의한 복지정치

농민당(중앙당)의 영향력과 연정 참여의 역사는 강한 사민주의의 영향력과 더불어 북유럽, 특히 핀란드에서 보편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이 발전되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
노동운동에 기반한 사민당이 주로 고용과 연계된 사회보장 시스템을 선호한 반면, 자영농과 농촌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한 농민당(중앙당)은 보편적 사회보험 정책을 추진했다. 보편성(universality)과 무조건성(unconditionality)을 핵심 특징으로 하는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중앙당의 정책 의제가 될 수 있었던 근원적 까닭이라 할 수 있다.

eu-dn-Taloustuktimus-Yle-20-3-14
2014년 유럽의회 선거 당시 핀란드 정당 현황 및 득표율

실제 이번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핀란드 사회보험청 Kela(Kansaneläkelaitos)도 원어로 국민연금기관이라는 뜻으로, 1920년대 사민당이 추진한 노동자 대상 건강보험 도입안을 당시 농민당이 의회에서 저지하고 1937년 연정을 통해 국민연금법을 제정한 뒤 설치한 기구이다. (사민당이 선호한 고용 기반 소득연계 연금 제도는 1960년대에 국민연금 제도와 병행하여 도입되었다.)
1954년부터 사회보험청장은 지금까지 모두 중앙당 출신의 인사가 역임해오고 있을 정도로, 중앙당의 이념과 가치, 정책 지향이 Kela의 운영 과정에 깊이 배태돼 있다.
핀란드 복지국가 형성과 발전을 둘러싼 역사적, 정치적 맥락과 과정을 고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왜 지금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 왜 지금과 같은 정책 추진 목표와 방식의 실험 모델이 채택되었는지 등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 있게 된다.

사진 3_Kela aitiyspakkaus-2016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핀란드 사회보험청(Kela)에서 제공하는 모성패키지(äityspakkaus). 신생아 옷과 돌봄 도구 등 50여 가지 물품이 들어 있는 현물 지원 수당으로 인기가 높다. 핀란드의 보편적 복지국가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회 창안(social innovations)의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특히, 1917년 독립 이후 내전과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 그리고 냉전 질서의 제약을 이겨내고 노사정+농민의 독특한 4자 협상 기반 코포라티즘(corporatism)을 제도화하며 합의적 민주주의와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한 20세기 핀란드의 정치경제사적 여정,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핵심적 기능을 수행한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정치적, 정책적 상호작용이 이번 기본소득 실험을 둘러싼 논쟁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실험이 중앙당과 유하 시삘라 내각의 정치적 지향을 중심으로 기존의 제안들 및 주요 정책 이해관계자 집단들의 의견을 타협, 절충한 한계적 모델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의 제도화를 향한 긴 여정에서 중요한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을 연 것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 기본소득 가능할까?

한국에서도 최근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녹색당 등 소수정당, 진보적 언론 매체 등을 중심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다운로드
녹색당은 2015년 3월 대의원대회에서 기본소득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bpark1391&logNo=220617491475)

그러나 한국은 매우 잔여적인(residual) 수준의 사회보장을 특징으로 하는 저부담, 저복지 국가에 머물러 있으며, 1990년대 이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심화된 고용 불안과 경제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총체적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특히, 노인과 아동, 청소년 등 사회적 취약 계층에 대한 긴급한 소득 지원의 필요성을 감안할 때 청년수당 등 유사 기본소득 논의가 가지는 개혁적 함의를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핀란드, 네덜란드, 스위스 등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된 복지국가와 사회보장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나라들이며, 이들 사회에서 기본소득 담론이 생산, 유통되는 정치사회적 컨텍스트는 한국의 그것과 매우 상이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번 광장의 촛불 민주주의가 보여준 역동적 에너지는 총체적 위기에 처한 한국 사회를 전면 개혁할 수 있는 역사적 가능성이 아직 존재함을 역설한다.
21세기 후기 근대의 탈산업사회적 현실을 첨예하게 경험하는 동시에 내전적 심리 구조와 피난민적 사회 불안이 일상화, 내면화된 한국 사회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사회적 권리를 누리고 공동체에 참여할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정치경제 모델을 마련하는 일은 지난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결정론과 미래주의적 언설에 기댄 이데올로기적, 총론적 주장들을 넘어 비판적 정책 연구와 심층 분석에 기반한 공적 토론이 절실히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