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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9일 일요일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다른백년 주간논평 2017.7.11.]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Tampere) 대학교 연구원(정치학 박사). 변화하는 의회-시민 관계를 중심으로 대의 민주주의와 대안적 형태의 시민 참여 사이에 나타나는 정치적 긴장과 다이내믹을 연구 중. 핀란드와 북유럽의 정치제도 및 복지국가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
지난 5월, 핀란드의 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토가 사망했다.
핀란드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었던 그는 재임 중 복지국가, 개헌, 중립평화외교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립 100년 만에 이뤄낸 핀란드의 성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의 재임 중 성과를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눠 2회에 걸쳐 싣는다. 
1. 국내정책 편: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최근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독일 방문 기간 동안 문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 중국 시진핑 주석, 일본 아베 총리,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등과 연속 회담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북핵 등 한반도 위기를 해결할 방법으로 ‘단계적, 포괄적 접근’과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해 트럼프 대통령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서도 한중관계의 회복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협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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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한미정상회담과 G20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정책의 운전대를 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북핵 등 한반도 주변 정세는 여전히 녹록치 않다 (이미지 출처: http://www.segye.com/)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독일 메르켈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진전, 그리고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에 대한 공통의 관심을 피력했다.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 ‘베를린 평화구상’(2017.7.6.)을 발표해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 추진,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등 핵심 정책방향과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비상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뒤 신속하고 광범위한 개혁 의제 선점을 통해 초기 높은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받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이로써 복잡하고 어려운 위기 상황의 한반도 국제정세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보편적, 민주적 가치에 기반한 ‘유능한 협상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따른 긴장 고조는 물론 의회 내 다수의석을 점하지 못한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개혁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 등 새 정부가 당면한 과제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쉽지 않은 국제, 국내 정치의 조건 속에서 한반도 평화공존체제 수립과 합의적 민주주의 구현 등 핵심 개혁 과제들을 어떻게 실현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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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100년 전 독립을 이룬 핀란드는 100년 만에 복지국가와 중립적 대외정책을 확립했다.

20세기 동안 내전과 대외적 전쟁,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분열 등을 지혜롭게 극복한 핀란드의 역사적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최근 세상을 떠난 한 전직 핀란드 대통령의 삶과 행동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를 보여준다.

독립 100주년, 핀란드인들이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의 죽음

2017년 5월 12일(금) 21시 15분, 핀란드 제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토(Mauno Koivisto)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다음날 핀란드 전역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가 게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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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핀란드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토의 초상화. 그는 올해로 독립 100주년을 맞은 핀란드에서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이었다.

현 대통령 사울리 니니스뙤(Sauli Niinistö)는 추모 성명을 발표했고, 공영방송 YLE는 하루 종일 추모 방송을 특집으로 편성해 내보냈다.
핀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한 대통령으로 인정받는 꼬이비스토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2회 연임). 전후 25년간 장기 집권했던 중앙당(Keskusta, The Centre Party)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Urho Kekkonen, 1956-1981년 재임)이 기력이 쇠해 사임할 당시 그는 사민당(SDP)-중앙당 연합정부의 총리를 맡고 있었다.
1982년 대통령 선거에서 폭넓은 지지로 당선되며 향후 30년간의 사민당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소련 붕괴, 경제위기, 유럽통합 등 대전환기에 핀란드를 이끈 그는 지혜롭고 합리적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1994년 퇴임한 뒤 부인 뗄레르보 꼬이비스토(Telervo Koivisto) 여사와 함께 시골집에서 숲과 정원을 가꾸며 소박한 삶을 이어가는 한편, 후임 아흐띠사리(Martti Ahtisaari, 1994-2000 재임), 할로넨 (Tarja Halonen, 2000-2012 재임) 대통령과 정부에 국제관계와 외교정책 등에 관해 조언하며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과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가 실용적 리더이자 독립적 지성인이면서 매우 소탈하고 겸손했던 정치인으로 진실로 ‘전 국민의 대통령’(koko kansan presidentti)이자 ‘나의 대통령’(minun presidentti)이었다며 슬픔과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평생 손으로 하는 노동과 작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 국제관계 분야에 두루 정통하여 깊이 숙고하고 사유하는 것이 몸에 밴 사상가이자 저술가로 ‘철인왕’(philosophy king)에 종종 비유될 정도였다.
평생 배구를 즐겨한 그의 두 손은 노동과 사유 둘 다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꼬이비스토는 핀란드가 내전과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2차 세계대전 및 전후 냉전 질서가 부과한 국제정치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오늘날의 성숙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적 국제관계를 달성하는데 기여한 탁월한 정치가였다.
20세기 핀란드의 현대사 굽이굽이를 지나온 뒤 독립 100주년인 2017년에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신생 민주공화국 핀란드의 첫 세기를 증언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어린 목수, 참전군인, 철학박사, 재무장관, 중앙은행장, 총리, 그리고 대통령의 삶

마우노 꼬이비스토는 1923년 핀란드 남서부 항구도시 뚜르꾸(Turku)의 한 가난한 조선 노동자(배 목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 황제 치하의 대공국(Grand Duchy of Finland) 지위에서 갓 벗어난 신생 독립국이었다. 독립 직후인 1918년에는 좌우 내전이 발발해 약 4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정치적 분열과 적대의 상처는 핀란드 사회를 깊이 갈라놓았다.
열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고, 초등학교를 마친 뒤부터 항만에서 여러 일을 익히느라 꼬이비스또의 유년기는 짧게 끝났다.
16세이던 1939년에는 소련의 침공으로 이른바 ‘겨울 전쟁’(Talvisota, 1939-1940)이 시작됐다. 어린 꼬이비스또는 소방의용군에 편입된 뒤 전방 부대에 배치돼 ‘계속전쟁’(Jatkosota, 1941-44)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생사가 엇갈리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그는 정신적(종교적) 전환을 경험한다. 전쟁은 또 그가 세계정세에 눈뜨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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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했을 때 꼬이비스토는 16세였다(왼쪽 사진). 전쟁은 어린 청년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싸우게 했고, 세계정세에 눈뜨게 했다. 오른쪽 사진은 전후 대학생이 된 꼬이비스또의 모습.

전쟁이 끝나고, 유공자로 전역한 꼬이비스토 앞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그는 1947년에 핀란드 사민당에 가입했고, 항만 노동조합에서도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했다.
당시 노동조합은 사민당과 공산당 활동가들로 진영이 갈려 파업 전략 등을 두고 노선 투쟁이 치열했다. 사민주의 노선을 추구한 꼬이비스또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꼬이비스토는 1947년부터 야간 학교를 다니며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했고, 이후 대학에도 입학했다. 교직 활동을 병행하며 학업을 계속한 끝에 1956년 ‘뚜르꾸 항만의 사회적 관계들’을 주제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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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후 노조와 직업 활동을 병행하면서 꼬이비스토는 공부를 계속해 1956년 뚜르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에는 향후 65년 간 평생을 함께 하며 가장 중요한 조언자가 되어준 부인 뗄레르보(Telervo Koivisto)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학위 취득 후 꼬이비스토는 1957년 헬싱키노동자저축은행(Helsingin Työväensäästöpankki)의 대표 자리를 제안받고 헬싱키로 이주한다.
이후 12년간 저축은행 대표 역할을 맡은 그는 경제 전문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사민당이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둔 1966년에는 재무장관에 발탁됐다.
1968년 핀란드 중앙은행장에 임명된 직후에는 총리로 다시 임명됐다.
께꼬넨 대통령 집권 시기에 성립된 사민당-중앙당 연합정부에서 총리(1968-1970, 1979-1982)와 재무장관(1966-67, 1972)직을 두 차례씩 역임한 그는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독립적 사유와 숙고된 판단을 중시하는 그는 강한 카리스마로 정치적 도전자를 잘 용납하지 않는 께꼬넨 대통령과 오래 호흡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내각에서 물러나 있는 사이에도 핀란드 중앙은행장으로 계속 활동했고, 이 시기 그가 획득한 경제와 재정 정책의 전문성은 경기 과열과 대소 무역의 붕괴 등으로 인해 그의 대통령 재임 후반기에 발생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경제 전문가였던 그의 재임 시기에 경제위기가 발생, 심화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소련 붕괴가 가져온 경제적 충격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환율 정책에 신중한 나머지 1980년대 후반의 인플레 현상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된다.)

핀란드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이끌다

그가 처음 총리로 임명된 1968년, 은 20세기 후반 핀란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핀란드 역사상 최초로 노사정 대표가 3자 협의체를 구성해 전국적인 임금 인상률과 주요 경제, 사회정책의 방향을 결정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임 빠시오(Rafael Paasio) 총리 때부터 추진된 협상은 꼬이비스토가 총리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결실을 맺었다.
1930년대부터 3자 합의에 바탕해 보편적 복지국가로 이행한 스웨덴, 덴마크와 달리 핀란드는 북유럽 국가이면서도 내전과 대소 전쟁 등의 여파로 같은 경로의 발전이 한 세대 동안 지연되었다.
사용자들은 노조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자주 총파업 등 물리적 투쟁으로 맞섰다. 내전 뒤에도 좌우 대립은 계속됐다. 나아가, 각 진영 안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들 간에 치열한 논쟁과 대결이 벌어졌고, 정국은 자주 소용돌이쳤다.
대소 전쟁 등 국가적 위기를 거치면서 민족적 단합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용자단체와 노조 간의 단체 협상이 개시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께꼬넨 대통령이 첫 취임한 1956년에도 대규모 총파업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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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노사정 합의를 계기로 핀란드는 민주적 코포라티즘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건설했다. 사진은 당시 역사적 합의를 도출한 노사정협의회 회의 장면.

그렇다면 1968년의 제도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중도우파로서 안정된 대러시아 관계 구축과 국내 사회통합에 역점을 둔 께꼬넨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정치적 뒷받침, 경기 인플레 등에 기인한 환율 재정위기라는 외부요인이 부과한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 196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사민당의 주도적 역할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 가능했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신조합주의(neo-corporatism)적 3자 이익 협상 체계가 제도화되었다. 일시적 중단 사례가 있지만 큰 틀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제도가 지속되면서 핀란드 노동시장 및 관련 사회⦁경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제가 되고 있다.
노사관계의 안정과 고속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핀란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고용, 주거, 교육, 의료, 사회보장 등의 영역에서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복지국가 관련 법제와 정책들을 완비할 수 있었다.
꼬이비스토가 각료와 총리로서, 나아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한 시기에 핀란드 사회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목도했던 것이다.

의회주의와 현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

핀란드가 또 하나의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해가는 과정은 분열과 대결을 특징으로 하던 ‘캠프 정치’(camp politics)의 시스템과 문화가 ‘합의 정치’(consensus politics)로 전환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역사적, 지정학적 여건과 선거제도의 영향 등으로 핀란드의 정치 체제는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정당 시스템과 ‘진영 정치’의 양상을 보였다. 준(準)대통령제 시스템 속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때때로 내각과 의회를 해산했고, 정치적 교착으로 인해 관료 내각이 들어서는 경우들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된 적록연정(punamultahallitus, 사민당-중앙당 연정)과 중앙 노동조합 조직들의 통합, 그리고 노사정 3자 협상의 제도화 등에 힘입어 핀란드 정치 시스템은 점차 안정돼 갔다.
특히 1982년 마우노 꼬이비스토의 대통령 취임 이후 중요한 정치적, 입헌적 개혁들이 시행됐다.
전임자 께꼬넨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이고 의회와 내각 중심의 국정 운영을 촉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부터는 소련의 반대 등으로 27년간 내각에 참여하지 못했던 보수당(Kokoomus)이 사민당과 ‘블루-레드 연정’(sinipunahallitus)을 통해 집권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는 이른바 ‘무지개정부’로 불리는 초다수적 연합정부 (super-majority seeking coalition government) 수립이 일반화되었다.
꼬이비스토의 재임 시기에 헌법개혁위원회가 출범해 바람직한 헌법 개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 제안했고,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점진적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우선, 그동안 300명의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전환돼 시민 참여가 대폭 확대됐다.
둘째, 대통령의 임기 제한 규정을 마련해 6년씩 2회(최대 12년)만 역임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1995년 핀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에 맞추어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전면 개정해 <유럽인권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 부합되도록 개편했다.
개정 헌법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근대적 주권 원칙에 기반한 시민권 모델을 뛰어넘어 보편적 인권 원칙을 헌법과 기본권 보장의 기본 원리로 수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기존의 부분적 개정 내용들을 집대성하고, 나아가 권력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전면적 헌법 개혁이 단행됐다. 회기를 달리한 두 차례의 의회 동의를 거쳐 2000년부터 발효된 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대신 의회와 총리의 권한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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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비스토의 재임 시기 핀란드는 의회주의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 헌법 전면 개혁이 단행됐다. 사진은 1980년대 이후 핀란드의 전현직 대통령들과 그 배우자들이 2012년 12월 6일 독립기념일 파티에 참석한 모습.

가장 중요한 변화는 총리 인선과 내각 구성의 권한이 대통령으로부터 의회로 이양된 것이다. 총리와 내각은 대통령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벗어나 의회에서 선출, 구성되고, 총선 결과를 반영해 원내 정당들 간의 협상을 거쳐 다수결로 선출되는 총리는 내각과 행정부의 운영에 대해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책임지도록 했다.
아울러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에도 중요한 제약이 가해졌다. 대통령은 여전히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고,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 기능은 형식적 절차의 차원으로 국한됐다.
대통령의 정부 정책에 대한 통제, 특히 께꼬넨 이래 대통령의 배타적 권한 영역으로 인식되던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중요한 개혁 조치가 취해졌다. 외교 정책에서도 정책 주도권이 총리와 내각으로 넘어간 것이다.
2000년 헌법 개정 이후 핀란드의 헌정 체제는 형식적으로는 준대통령제(semi-presidentialism)이지만 실질적 측면에서 표준적 형태의 의회주의(parliamentarism)로 전환되었다고 정치학자들은 평가한다.
최근 2012년의 헌법 개정은 의회주의적 권력 구조 개편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유권자 5만 명 이상이 서명한 경우 의회가 그 입법 정책안을 심의하도록 하는 시민발의제도(citizens’ initiatives)를 도입해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했다.
그 자신 한 번도 국회의원이었던 적이 없었던 꼬이비스토가 의회중심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일견 역설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정당 내부에서 커리어를 쌓아간 기성 정치지도자들과 다른 경로를 통해 장관과 총리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전임 대통령과 달리 소수의 측근들로 구성된 권력의 요새를 구축하지 않았고, ‘올드보이들’ 간에 벌어지는 폐쇄적 권력 투쟁 성격의 정치행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의회와 제 정당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께꼬넨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퍼져있었고, 이는 의회주의적 헌법 개혁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합의와 추동력을 제공했다.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2), 대외정책 편은 다음에 계속)
(이 글의 저자인 서현수 박사는 지난 5월 핀란드 땀뻬레대학에서 핀란드의 의회정치와 시민참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여기(☞Reaching Out to the People)를 클릭해 다운받을 수 있다).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2), 어떻게 중립평화외교를 확립했나

[다른백년 주간논평 2017.7.12]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2), 어떻게 중립평화외교를 확립했나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Tampere) 대학교 연구원(정치학 박사). 변화하는 의회-시민 관계를 중심으로 대의 민주주의와 대안적 형태의 시민 참여 사이에 나타나는 정치적 긴장과 다이내믹을 연구 중. 핀란드와 북유럽의 정치제도 및 복지국가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
지난 5월, 핀란드의 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토가 사망했다.
핀란드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었던 그는 재임 중 복지국가, 개헌, 중립평화외교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립 100년 만에 이뤄낸 핀란드의 성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의 재임 중 성과를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눠 2회에 걸쳐 싣는다. 
2. 대외정책 편: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2), 어떻게 중립평화외교를 확립했나
대통령으로서 마우노 꼬이비스토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빠시끼비-께꼬넨 노선’(Paasikivi-Kekkosen linja)로 알려진 전임 대통령들의 중립 평화 외교 노선을 한 단계 심화 발전시킴으로써 동서 냉전의 해체와 유럽 통합 등 국제질서의 대전환기를 지혜롭게 헤쳐나간 일이다.

동과 서 사이에서, 중립 평화 외교의 계승자

폴란드, 체코, 헝가리, 발트3국, 우크라이나 등 다른 ‘경계국가’(border country)들처럼 핀란드도 동과 서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소로 인해 20세기 내내 내전과 전쟁, 냉전 제약 등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의 평화조약 협상을 주도했던 외교관 출신 대통령 빠시끼비는 핀란드가 ‘지리’(geography)를 바꿀 수는 없는 이상 “동쪽의 이웃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며 서방과 소련 사이의 중립적 외교 노선을 천명했다.
보수당 출신이지만 합리적 실용주의자였던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는 말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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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중립평화외교의 기틀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빠시끼비 대통령(사진 왼쪽)과 께꼬넨 대통령

빠시끼비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께꼬넨도 같은 노선을 견지했다. 그는 핀란드는 국제관계 문제의 ‘재판관’(judge)이 아니라 ‘의사’(doctor)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권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과 1950~60년대의 대소 관계 위기(소련이 민주화와 인간적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 진압할 당시 핀란드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등을 집중된 권력의지와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극복한 께꼬넨 대통령은 빠시끼비의 소극적 중립외교 노선을 한층 업그레이드된 적극적 평화외교로 발전시켰다.
실제로 중도우파인 농민당(현 중앙당) 출신이면서도 적극적 대소 우호 정책을 펼친 그는 후르시초프, 브레즈네프 등 소련 서기장들과 사우나 외교를 통해 막역한 친구 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 오히려 소련으로 치우친 듯 보였던 핀란드 정부의 대외 중립 외교 정책은 서구의 외교 이론가들로부터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 불리며 비판받기도 했다.
재임 초기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그 진의를 의심할 정도로 소련과의 전폭적 신뢰 관계를 구축한 께꼬넨은 국내 권력 기반이 안정되고 세계적인 데탕트(해빙) 물결이 시작되던 1970년대 적극적 평화외교정책을 추진한다.
미국과 소련, 서구와 동구 사이의 소통의 메신저로서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그 결실은 역사적인 1975년의 헬싱키 평화협정 체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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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에서는 동서 양 진영의 34개 나라 정상이 ‘최종의정서’ 체결을 통해 ‘인권 존중’과 ‘국경 및 체제 존중’을 맞바꾸는 헬싱키협약을 체결했다.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uvx&articleno=7813803&categoryId=812900®dt=20160403185527)

20세기 핀란드를 대표하는 건축가 알바르 알토(Albar Aalto)가 설계한 헬싱키 핀란디아홀(Finlandia Hall)에서 개최된 <유럽안보협력정상회의>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 등 동서 진영의 34개국 정상이 한데 모여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절차와 방안을 담은 협약에 서명한 것이다. 당시 동독과 서독의 수상도 함께 참여하여 회담하는 등 큰 성과를 올린 역사적 정상회의 개최로 핀란드의 국제적 위상도 한껏 고조됐다.
그러나 아직 냉전 질서는 강고했고, 미소 간의 핵무기 군사경쟁 등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께꼬넨 대통령이 연로한 나이와 체력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나선 데는 불안정한 국제관계에 대한 (독단적) 책임감도 작용했다. (당시 쓴 일기들에서 그는 종종 세계정세의 불안정한 발전에 대한 우려와 책임감을 토로하고 있다.)
께꼬넨의 사임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꼬이비스또에게는 빠시끼비와 께꼬넨으로 이어진 중립 평화외교를 한층 발전시키는 동시에 국제질서의 대변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이중의 과제가 주어졌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신보수주의를 표방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섰고, 소련은 이내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주도하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으로 변화의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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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비스토 대통령은 ‘빠시끼비-께꼬넨’으로 이어지는 중립 평화 외교를 계승 발전시켰다. 1990년 미소 정상을 헬싱키로 초청해 공동 정상회담을 개최한 일은 그의 가장 큰 외교적 업적으로 꼽힌다.

꼬이비스토 대통령은 핀란드 공산당과의 경쟁 관계에 있는 핀란드 사민당에 대한 소련 권부의 전통적 불신을 극복하며 외교적 성공의 첫 발걸음을 뗀 뒤, 점차 미소간 핵무기 감축과 평화 협상을 촉진하는 메신저 겸 중재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그는 러시아어를 직접 익히고 소련의 고위 인사들과도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소련 내부의 사정에 정통했고, 레이건과 부시 등 미국의 대통령들은 그의 해박한 식견과 외교적 역량을 존중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 미국의 조시 부시 대통령 내외와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내외를 헬싱키로 초청해 공동 정상회담을 개최한 일은 그의 외교 활동 중 백미로 꼽힌다.

대전환기, 유럽통합으로 향한 길

1980년대 후반에는 세계정세가 급변하면서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19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독일 통일, 그리고 1991년의 군사쿠데타 실패에 이은 고르바초프의 실각과 소련 해체 등이 꼬이비스토 대통령의 재임 2기에 발생했다.
사태는 꼬이비스토의 예상을 뛰어넘어 훨씬 빠르고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대소관계의 안정적, 평화적 관리에 최우선적 역점을 둬왔던 전후 핀란드의 외교안보 정책에 첨예한 도전 과제가 제기된 것이다.
꼬이비스토는 신중하게 사태를 관찰하며 핀란드 외교정책의 전환을 준비했다. 우선 소련 해체 직후인 1992년, 1948년부터 체결해온 소련과의 ‘우호협력⦁상호지원조약’의 연장을 중단했다.
냉전 시기 이 조약이 부과한 정치 군사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뒤에는 서방으로 눈을 돌려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했다.
핀란드는 1994년 국민투표를 통해 EU 가입을 결정했다. 100년 전 러시아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핀란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소련이 부과한 제약에서 다시 온전히 벗어나 새로운 초국적 정치경제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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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비스토는 ‘전환기의 대통령’이었다. 독일 통일과 소련의 갑작스런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자 그는 외교 전략을 전환해 핀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 성사시켰다.

꼬이비스토의 뒤를 이은 아흐띠사리, 할로넨 대통령도 유럽연합과 UN 등 국제무대에서 핀란드의 평화 인권 외교를 지속, 확대하며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수행해냈다. (아흐띠사리는 2008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0년대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해 크림반도를 일방 병합하는 등 유럽 외교안보 질서에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고, 현 핀란드 대통령 니니스뙤(보수당, 2012~재임 중)는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 대화를 중재하는 등 2000년 헌법 질서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꼬이비스토의 유산이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적 혁신과 통합을 위한 리더십

마우노 꼬이비스토 대통령이 서거한 지 2주 뒤인 2017년 5월 25일(목) 오후 1시부터 헬싱키 대성당에서 부인 뗄레르보와 딸 아씨(Assi Koivisto) 등 가족과 친지, 그리고 전현직 대통령들과 현 총리 유하 시삘라(Juha Sipilä)를 비롯한 삼부 요인과 각국 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한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생명을 다한 그의 육신은 하얀 바탕에 파란 십자가와 붉고 노란 사자 문양이 새긴 핀란드 국기로 감싼 관에 담겨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성당을 출발한 장례 차량이 헬싱키 대학, 상원 광장, 정부청사, 중앙은행, 대통령궁, 의회를 지나 묘지가 있는 히에따니에미(Hietaniemi) 공원으로 향할 때 거리에 나온 수만 명의 시민들은 조용한 침묵의 눈길로 깊은 존경과 추모의 인사를 보냈다.
청명한 북구의 초여름 하늘 아래 신록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가지들이 군악대의 연주를 실은 바람결에 고요히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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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5일 꼬이비스토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 옆 자리에 그가 묻힌 헬싱키 국립공원 묘소에는 시민들의 참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이 글의 필자가 묘역을 방문한 2017년 6월 14일의 풍경.

어린 나이에 직업 활동을 시작하고 전쟁에 참전했던 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중앙은행장, 재무장관, 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되어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통찰하며 핀란드형 복지국가, 합의 민주주의, 중립 평화외교를 완성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유라시아 대륙의 맞은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우리는 아직 20세기가 강요한 내전과 전쟁 상태를 완전히 종식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익과 관점이 정치적으로 온전히 대표되는 민주주의 제도를 발전시키지 못했고,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구조의 변동에 대응하는 역동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수립하지 못했다.
대통령 탄핵과 촛불 시민혁명이라는 비상한 계기를 통해 등장한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에 시민들이 보내는 높은 기대는 동시에 한국사회가 처한 엄중한 위기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새 정부가 검찰, 국정원, 언론 개혁 등 부패한 구체제(ancien régime)의 청산과 극복, 경제사회적 불평등 해소 및 지속가능한 복지사회 건설, 한반도 분쟁 완화 및 평화공존체제로의 전환, 헌법 개혁과 선거제도 개편을 통한 민주주의 질서의 재구성 등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탁월한 역량과 리더십을 발휘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새로운 불확실성의 시대, 2018년 유럽과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2018년 1월 4일 라이프인 칼럼]

2017년이 저물고 2018년 새해가 밝았다. 20세기 세계사를 뒤흔든 러시아혁명 100주년이었던 2017년은 100년 전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시대 전환의 징후가 될 만한 중요한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세계가 커다란 정치적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퇴행적 스타일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를 통해 미국과 세계 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푸틴 러시아의 대선 개입 스캔들과 본인의 성추문 의혹 등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오바마와 민주당 정권이 8년 간 어렵사리 이룩한 대내외 정책 성과들을 1년 만에 무위로 돌리거나 오히려 더욱 후퇴시켰다.

파리 기후변화 협약의 일방적 탈퇴 등 트럼프 행정부가 표방하는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적 외교정책 노선은 유럽의 외교안보 상황에도 중대한 파장을 몰고왔다. 2017년 3월의 G7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와의 불만스런 만남 이후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우리가 타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시대는, 어느 정도, 지나갔다”며 “우리 유럽인들은 진정으로 우리의 운명을 우리 자신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역설했다(The Guardian, 2017.5.8. 기사 참조). 여기서 ‘타인들’(others)이란 트럼프의 미국만이 아니라 2016년 여름 브렉시트(Brexit) 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 탈퇴를 선택한 영국이 포함된다. 영국 보수당 총리들의 정치적 기회주의는 전임 카메룬 총리에 그치지 않고 현 메이 총리에게도 이어져 그녀는 2017년 6월 조기총선의 승부수를 던졌다. 카메룬은 EU 탈퇴를 요구하는 포퓰리스트 민족주의 영국독립당(UKIP)의 보수당 기반 잠식을 저지하려 했고, 메이는 EU와의 브렉시트 협상 전에 영국 의회에서 큰 격차의 과반수를 점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기회주의적 정치 행위의 결과는 ‘자기발등 찍기’로 드러났다. 보수당은 기존보다 13석이 준 318석을 획득해 오히려 의회 과반수를 잃은 뒤 북아일랜드 기반 보수주의 소수정당 DUP와 연정을 꾸려야 했다.

2017년 3월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G7 정상회담에서 만난 국가 정상들과 EU 의장단 (www.consilium.europa.eu/en/media-galleries/international-summit/2017-05-g7-summit-taormina/)

이러한 상황에서 메르켈은 유럽연합의 쌍두마차라 할 프랑스의 새 대통령 임마누엘 마크롱을 새로운 파트너로 맞이했다. 젊고 깨끗한 정치인 이미지를 내세운 마크롱은 집권 사회당의 분열과 우파 후보의 부패 스캔들을 어부지리로 삼고 결선투표제의 이점을 활용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이원집정부제 하 프랑스 대통령에게 부여된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권한을 통해 의회에서도 순식간에 일당의 지위를 점했다. 극우 정당인 프랑스 국민전선 마린 르펜의 대통령 도전이 실패로 돌아간 데 안도하면서 메르켈은 (시장 친화적) 유럽통합의 열렬한 옹호자인 마크롱과 더불어 영국 없는 유럽연합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새로운 불확실성과 위기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그 동안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유럽연합을 사실상 이끌었던 독일의 위상과 메르켈의 리더십에도 균열이 발생했다. 2017년 9월 총선에서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당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지율 폭락으로 빛이 바랬다. 전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 의장이던 마틴 슐츠(Martin Schultz)가 이끄는 사민당은 전후 역사상 최저 득표율을 기록하며 연정 협상 불참을 선언했다. 반면,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은 5 퍼센트 진입 장벽을 넘어 의회에 처음 진출했다. 선거 이후 메르켈이 주도한 연정 협상이 결렬되면서 독일 정치는 장기간 표류했고, 사민당이 입장을 바꾸어 연정 협상에 임하는 상황이 됐다. 미국, 영국, 프랑스에 이어 독일에서도 전후 민주주의 질서를 주도해온 좌우의 중도 정당들이 기득권 엘리트 세력으로 비난받으면서 극우와 극좌, 특히 민족주의 포퓰리스트 정당들로부터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약 3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EU 확대를 통한 통합과 번영의 시대를 낙관하던 유럽 시민들은 EU의 역할과 유럽 통합의 미래에 대해 점점 더 불신하게 되었다. 10년 전인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에 영향을 받은 유럽 재정위기는 유럽연합의 정책 결정 시스템과 위기 대응 능력의 중대한 결함을 드러내며 남유럽과 북유럽 간의 분열을 불러왔다.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과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사태는 ‘소프트파워’를 내세운 EU 외교안보 역량의 중요한 한계를 드러냈다. 선거 민주주의의 포장 아래 푸틴의 장기 집권을 용인하며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한 러시아가 지정학적 슈퍼파워로 귀환한 것을 알린 일련의 사태 전개는 유럽 전역에서 군사적, 정치적 긴장을 다시 불러냈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는 유럽 내부의 사회경제적 균열과 국제관계의 균열에 더해 인종, 국적, 종교, 섹슈얼리티 등 문화적 정체성 이슈를 둘러싼 논쟁과 갈등을 촉발시켰다. 특히 난민 행렬에 대한 동유럽과 서유럽의 상반된 대응이 전개되면서 양 지역 국가들 사이의 커다란 간극이 새삼 환기됐다. <유럽연합 헌장>과 <유럽 인권협약> 등에서 내걸고 있는 민주주의, 법치주의, 인권의 3대 가치와 원칙들이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에서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가치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의 위상과 역할에 경고등이 켜졌다. 서유럽에서도 이민 규제를 요구하는 민족주의 포퓰리즘 정당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국경 통제와 치안 강화, 이민과 난민 자격의 엄격한 심사 정책이 추진됐다.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포용적 난민 정책을 펴온 스웨덴의 사민당 정부가 극우 스웨덴 민주당(Swedish Democrats)의 득세를 막기 위해 2015년 가을 국경 통제를 강화하는 등 정책 전환을 단행하자 유럽 시민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는 동유럽과 서유럽 간의 격차를 환기시키는 한편 유럽 시민들의 불안을 자극해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의 영향력 확대를 불러왔다. (이미지 출처: https://www.statista.com/chart/11215/europe_-refugees-in-limbo/)

그리하여 2018년 새해 벽두의 유럽과 세계는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혁명과 내전,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장기 냉전과 진영 간 대결 체제를 거치며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체제로 수렴되는 듯 보였던 세계사의 전개는 어디로 방향을 틀 것인지 매우 불확실한 상태가 되었다. 시장 근본주의와 국가주의적 전체주의가 경합하던 ‘극단의 시대’를 뚫고 사회적 조정 시장경제와 합의 민주주의에 바탕한 보편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수립한 북유럽 국가들도 다가오는 ‘슈퍼’ 불확실성의 시대에 다각도로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와 서구 사이에서 20세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은 핀란드에서는 2017년 독립 100주년과 2018년 내전 100주년을 맞아 과거의 성찰과 미래의 설계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2018년, 유럽과 세계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의 도전, 슈퍼파워들의 귀환과 권력정치(real politics)의 득세, 그리고 ‘4차 산업혁명’으로 운위되는 고도 과학기술과 정보 자본주의 시대에 새로운 정치적 대안은 어떻게 가능한가?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어떤 사회적, 민주적 혁신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는가? 유럽이 당면한 도전과 변화는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향후 필자가 쓰는 칼럼들은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고정된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후기) 현대성의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특정 국가나 지역을 하나의 고정된 모델로 간주하고 이를 본받자는 관습적 접근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북)유럽도 한국도 전환기적 시대 변화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우리가 발딛고 선 삶의 현실과 맥락에 대한 치열한 성찰, 현실 너머의 새로운 사회를 전망할 수 있는 정치적, 정책적 상상력, 그리고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들의 자기조직화와 연대가 절실히 요청된다.